한국 이주 노동자가 네팔감리교회 감독이 되다

한국 이주 노동자가 네팔감리교회 감독이 되다

 

– 수먼 고우덤 목사 이야기 출판 … 감사예배 드려
– from Nepal Brahmin to Korean Pastor

네팔감리교회 수먼 고우덤 감독의 삶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그려낸 'from Nepal Brahmin to Korean Pastor 수먼 고우덤' 출판감사예배가 10월 7일 감신대에서 열렸다. 예배를 마친 후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에 임하고 있다.
네팔감리교회 수먼 고우덤 감독의 삶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그려낸 ‘from Nepal Brahmin to Korean Pastor
수먼 고우덤’ 출판감사예배가 10월 7일 감신대에서 열렸다. 예배를 마친 후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에 임하고 있다.
감사의 인사를 하는 첫 마디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수먼 감독
감사의 인사를 하는 첫 마디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수먼 감독

 

외국인 노동자로 한국에 건너와 가구공장과 유리공장 노동자로서 살던 네팔 힌두교 청년이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대학원 과정을 마친 후 목사가 됐다. 더 나아가 목회학박사 학위까지 받고 선교사 신분이 돼 조국으로 돌아가 힌두교의 살얼음판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네팔신학교 교수이자 네팔감리교회의 감독이 됐다. 단순한 나열이지만 그 시간 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역경과 고비가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입술로 고백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도 많을 것이다. 그것들을 글로 표현해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정성으로 엮은 책의 출간을 감사하며 그와 함께했던 이들이 모여 출판감사예배를 드렸다.

10월 7일(화) 오후 1시 감신대(유경동 총장) 웨슬리세미나실에서는 네팔감리교회 수먼 고우덤 감독의 이야기를 엮은 《from Nepal Brahmin to Korean Pastor 수먼 고우덤》 출판감사예배가 있었다. 저자 수먼 감독을 비롯해 감신대 은사인 이덕주 교수(명예교수)와 그의 사역 후원자로 오랫동안 함께한 김종수 목사(세신교회 원로), 서후현 목사(예장백석 아성교회), 신태하 목사(보문제일교회), 박대일 목사(청량리교회), 안호선 목사(안산제일교회) 등이 참석해 설교와 축사, 격려사로 감동을 더했다. 기감 선교국에서도 태동화 총무가 참석해 축사와 함께 축도했으며 그밖에 수먼 감독과 인연을 맺은 여러 지인들이 함께하여 가슴벅찬 시간을 연출했다. 특별히 수먼 감독의 감신대 재학시절과 사역 기간에 든든한 후원자로 동행한 세신교회와 꽃재교회 성도들이 참석해 축하했다.

 

감사예배

축하감사예배는 전완 목사(만민교회)의 사회로 시작해 원영만 목사(양문교회)의 기도, 꽃재교회 선교부의 특송에 이어 김종수 목사(세신교회 원로)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행 13:21~23)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하는 김종수 원로목사
설교하는 김종수 원로목사

 

김종수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개척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해외선교가 큰 역할을 했다며 특히 네팔에 교회와 목회자를 세우는 일에 매진했다고 소개했다. 여러 결실 중에서 귀한 열매로 맺힌 사람이 수먼 고우덤이라며 목회자가 되고 본국 감리교회의 감독까지 됐으니 진심으로 기쁘다고 감회를 전했다. 자신과 세신교회가 열심히 후원했지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한 것에 관해 마음 다해 축하한다고 전했다.

본문의 이야기로 들어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몇 가지 주요한 특징이 있다며 네 가지를 언급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며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면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둘째로,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면 하나님께 인정 받게 돼 쓰임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셋째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신다며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드러내는 믿음의 모습이 되면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부연했다. 이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라며 이 날의 주인공인 수먼 고우덤을 비롯해 함께한 모든 이들이 그 주인공이 되길 축복한다는 말로 설교를 마쳤다.

이어 축사가 이어졌다. 가장 먼저 축사에 나선 서후현 목사(아성교회)는 자신을 예장백석 소속이라고 소개한 후 수먼 감독과 인연을 맺은지 28년 됐다고 언급했다. 백석 교단에서 품을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며 감리교회와 함께해 오늘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음을 축복한다고 덧붙였다. 품는 것의 은총에 관해 성경의 인물, 보아스를 예로 들어 설명한 서 목사는 수먼 감독을 비롯해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 품음으로써 ‘빛나는 보아스’가 되길 바란다고 축복했다.

 

축사를 전하는 서후현 목사
축사를 전하는 서후현 목사
축사를 전하는 신태하 목사
축사를 전하는 신태하 목사

 

두 번째 축사자로 등단한 신태하 목사(보문제일교회)는 자신이 미국에서 목회할 때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서 친구로 만난 사람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소개했다. 수먼 감독을 선교사역으로 만나지 않고 친구로서 만났기에 지금까지 좋은 인연으로 교제하고 있다며 책 출간을 축하하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열어 가시기를 축복한다고 전했다. 계속하여 목회자들은 예수의 제자로서 그를 닮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예수처럼 낮아진 곳에서 훈련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 받아 목회자의 삶을 살아가니 의미가 깊다며 그 스토리를 통해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는 통로로 살아가길 축복한다고 전했다.

마지막 축사자인 박대일 목사(청량리교회)는 잠시 책을 읽으며 단기선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고 인연을 소환하면서 책이 인연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통로가 됐다고 언급했다. 수먼 감독은 ‘겉은 네팔인이지만 속은 한국인’이라며 그를 만날 때마다 참된 목회자요 선교사라고 생각했다는 말로 수먼 감독을 소개했다. 수먼의 스토리는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라며 책을 읽는 이들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하고픈 책이라며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했다.

 

축사를 전하는 박대일 목사
축사를 전하는 박대일 목사

 

이어 책을 출판한 신앙과 지성사 대표 최병천 장로가 출판 배경과 과정에 관해 소개했다. 최 장로는 신앙과 지성사가 비록 작은 출판사지만 좋은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름대로 애쓴다며 ‘올해의 우수도서’에도 다수의 책이 선정된 바 있다고 소개했다. 네팔신학교 도서관에 영어 원서 2만 권 이상을 보내는 것이 선교적 과제라며 현재까지 3천 권을 보냈다고 전했다. 항공발신비도 많이 소요되는데 여러 감리교회들이 연합하여 해낼 수 있었다며 계속해서 양서를 보낼 수 있도록 관심 가져 달라고 안내했다. 수먼 감독의 책은 외국인선교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라며 책을 발간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수먼 감독을 만났을 때 삶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자고 자신이 먼저 제안했다며 사양하는 수먼 감독을 설득했다고 소개했다. 한국말은 어느 정도 하지만 글에는 자신 없다는 수먼 감독에게 정리연 작가(에큐메니안)를 소개해 작업하게 했다며 정리연 작가가 네팔 현지에 2주 동안 머물며 인터뷰하기도 했다고 부연한 후 참석자들에게 정 작가를 소개했다.

 

출판 배경과 경과에 관해 설명하는 최병천 장로
출판 배경과 경과에 관해 설명하는 최병천 장로
격려사는 전하는 안호선 목사
격려사는 전하는 안호선 목사

 

그리고 이어진 격려사는 안호선 목사(안산제일교회 선교담방 부담임)와 이덕주 교수(감신대 명예교수)가 차례로 전했다. 안호선 목사는 수먼 감독과 안산제일교회와의 인연을 언급한 후 수먼 감독의 책은 하나의 이야기(story)로써 삶을 향한 고민과 존재가 들어 있어 힘이 있다고 소개했다. 안산에는 1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있다며 책이 그들에게 귀한 힘과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이 네팔 신학교를 방문하여 60명이 훈련 받고 있음을 봤다며 수먼 감독의 가르침으로 인해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잘 훈련되어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되길 기원한다고 축복했다.

이덕주 교수는 수먼과의 인연이 20년 됐다며 수먼을 비롯해 네팔과 캄보디아 등에서 온 신학생들이 힘들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통해 함께 기도했다고 소개했다. 그들 스스로 모임의 이름을 ‘겨자씨기도회’라고 명명해 기도하면서 마음 속에는 자괴감이 있었다며 그것은 곧 ‘우리는 하잘 것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었다고 전했다. 특히 본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기에 스스로를 겨자씨와 같은 존재로 여긴 듯 하다고 부연했다. 그들에게 성경에서 언급한 겨자씨의 의미를 들려주면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며 그 자부심으로 버텨 지금은 거목이 됐다고 강조했다.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깃드는 거목으로 성장하는데 20년이 걸렸다며 책에는 도움 받은 사람의 이름이 60명 정도 되지만 실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는 갑절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수먼 감독은 이제 네팔의 거목이 되어 겨자씨를 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 우리의 일은 그가 400개의 네팔감리교회들을 관리하고 200명의 졸업생들과 신입생들이 있는 네팔신학교를 잘 이끌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라고 권면했다. 계속해서 그가 네팔에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이룬 교회 성장이 네팔에서도 일어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하고 관련맺어 가야 할 것이라며 특별히 외국인과 결혼해 동고동락한 부인 박옥례 사모를 향해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며 참석자들의 박수를 유도하는 것으로 격려했다.

수먼 고우덤 감독 부부를 불러내 이들과의 인연을 설명하며 격려사를 전하는 이덕주 교수
수먼 고우덤 감독 부부를 불러내 이들과의 인연을 설명하며 격려사를 전하는 이덕주 교수
출판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수먼 고우덤 감독
출판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수먼 고우덤 감독

 

마지막으로 수먼 고우덤 감독이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최병천 장로의 책 발간 제안을 거절했지만 결국 발간하게 됐다며 후원자들과 관련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책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부담이 많았다며 앞으로 더 똑바로, 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각오를 밝혔다.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책에서 이름이 틀린 분들에게 미안하다며 한글에 서툴러서 그렇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웃음을 유발했다.

최병천 장로와 정래연 작가에게 감사를 전하고 특별히 이덕주 교수께 감사의 마을을 전했다. 감신대에서 공부하면서 분위기 적응이 힘들어 1학년을 마친 후 그만 두려고 했을 때 붙잡아 주신 분이 이덕주 교수라며 그때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자신이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안산제일교회(고훈 목사)에서의 사역에 관해 언급하면서 감사를 전한 후 한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2011년 네팔로 돌아가 사역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은 없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셨다고 신앙고백했다. 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길에서 그 뜻대로 쓰임 받길 원한다는 말로 인사를 마쳤다.

선교국 태동화 총무의 축도로 출판감사예배를 마쳤다. 태 총무는 축도하기 전에 감리교 선교의 효시 아펜젤러의 순직 연도(1902년)에 기감 최초의 해외선교사(홍승하 전도사/ 하와이)를 파송했다는 점과 지금까지 기감은 전 세계에 2,4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현재 81개국에서 1,285명의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이러한 선교 물줄기의 영향을 받은 수먼 감독의 헌신과 사역을 통해 네팔의 선교 역사가 더욱 확장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로 축복했다.

축사를 전한 후 축도하는 태동화 총무
축사를 전한 후 축도하는 태동화 총무

 

수먼 고우덤이 걸어온 삶의 길 … 책 내용 요약

태어나자마자 미래의 꿈을 꾸는 것에 한계가 정해져 있다면 어떨까? 누구나 노력하면 기회를 얻어 대통령이 되고 대학교수나 기업가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대한민국과 달리 남아시아의 네팔은 계급에 따라 정해진 한계가 있다. 이는 힌두교의 영향으로 생긴 카스트라는 계급제도 때문이다. 네팔은 1963년에 카스트제도 폐지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관습과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의 성과 외모만 보고도 어느 카스트인지 알 수 있기에 쉽게 관습을 뿌리 뽑는 것이 어렵다.

카스트는 브라만, 체트리, 바이샤, 수트라 네 개의 등급으로 나눠져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다양하다. 예전에는 카스트제도로 직업까지 정해졌을 정도다. 성직자나 학자 등 정신적 측면이 강조되는 직업은 브라만의 몫이고 상업이나 공업에 해당하는 직업은 낮은 카스트의 몫이었다. 또 카스트제도에 속하지 못한 ‘불가촉천민’(달리트)이 있다. 이들의 인구 비율은 약 20%로 알려져 있다. 보통 시골 변방에 격리되어 거주한다.

수먼은 브라만 계급에서 태어났지만 시골의 가난한 집안이었다. 가족과 이웃, 동네 모두가 가난했다. 그래서 돈을 벌기로 했고 해외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받는다는 말에 사우디아라비아와 말레이시아, 한국 사이에서 고민했다. 모두 모르는 나라지만 돈을 많이 준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생각이 거듭 바뀌었다. 결국 한국으로 결정한 그가 브로커를 통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날이 1991년 10월 18일,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때부터 한국에서 가구공장 노동자의 삶이 시작됐고 개신교로 개종하는 ‘중생체험’도 했다. 취업비자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공장주의 배신으로 불법체류자가 되어 신분을 회복하는데 많은 돈을 써야 했고 다시 유리공장으로 옮겨 일했다.

그 시기에 신학교 공부를 결심하고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시작했으나 지치고 힘들어 자살까지 생각했다. 고단함으로 지친 삶에 평안을 주고픈 마음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둘 생각까지 하던 찰나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마음을 바꾸자 곧 천사가 나타났다. 거주지 문제로 고민하던 자신에게 교회의 전도사로부터 집에 들어와 함께 살아도 된다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축복도 누렸다. 그가 바로 지금의 아내인 박옥례 사모다.

조국을 떠나 한국으로 온지 7년 만인 1998년, 네팔로 잠시 돌아갔다. 힌두교를 포기하고 개신교인이 된 그를 반길리 없는 가족들의 핍박을 꿋꿋이 이겨내며 견디던 그에게 가장 먼저 힘이 되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어느날 성경을 달라고 하여 두 달 동안 읽은 아버지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자신에게 “네가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겠지만 계속 가라. 나는 뭐라고 하지 않겠다.”라며 주변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방패가 되어 주었고 하나님을 믿겠다는 고백까지 했다.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아버지였지만 곧 하나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있을 수 없었다. 개신교인이 된 그를 친척들이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눈물로 떠나보낸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쫓겨난 그는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마음에서 비자를 기다리던 그에게 소식이 온 것은 2003년 2월, 한국에 다시 돌아온 그는 세신교회 김종수 목사를 찾았다. 김종수 목사가 세신교회 교우들과 네팔에서 단기선교를 할 때 통역하며 인연을 맺었다. 김종수 목사는 그가 감신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자금과 숙소를 후원했다. 그렇게 감신대에서의 신학생 생활이 시작됐고 그때 만난 인생의 은인, 은사가 한국교회사를 가르치던 이덕주 교수다. 세신교회 교육관에서 함께 지내며 감신대에서 공부하던 김호운 전도사(중국인 유학생)의 소개로 만난 이덕주 교수는 그에게 인생의 멘토요 스승이었다. 이덕주 교수의 주선으로 당시 네팔,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몽골, 베트남, 일본, 브라질, 중국, 카자흐스탄 등에서 유학 온 10여 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이 모임을 결성했다. ‘겨자씨기도회’(눅 17:5~6)라고 이름 붙이고 매주 수요일마다 이덕주 교수의 연구실에 모여 예배했다. 그때 이덕주 교수의 메시지는 그와 유학생들에게 한 주간을 살아내는 영양분이 됐다.

2006년 4학년 때부터 선교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부 졸업 후 곧바로 신학대학원에 입학해 2009년 2월 졸업했다. 이어 한 달 후 조국 네팔로 돌아갔다. 네팔에서 사역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으로 올 때는 혼자였지만 두 번째 조국으로 돌아갈 때는 아내 박옥례 사모와 딸 소피아가 함께했다. 그러나 네팔에서의 사역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깨닫고 6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안산제일교회(고훈 목사/허요한 목사)에서 주말에만 네팔예배 담당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그리고 평일에는 화재보험회사에 취직해 개인상해보험에 가입한 네팔 사람의 통역 역할을 했다. 그렇게 ‘이중 생활’을 1년 동안 어어갔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보험회사를 사직하고 부인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길 기다렸다.

1학기 과정만 마친 상태로 중단했던 선교사 훈련이 2011년 스리랑카에서 재개된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해외훈련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대한수도원 박명희 원장의 후원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끄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덕주 교수의 소개로 미국 웨슬리신학대학원 신경림 부총장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박사과정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미국과 한국, 중국의 캠퍼스를 돌며 코스웍을 마치고 미국에서 졸업했다.

그리고 2011년 4월 계속 기도하던대로 조국 네팔을 향해 떠났다. 네팔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먼저 네팔에 입국해 신학교 사역을 하고 있던 박대인 선교사의 제안에 따라 신학교 사역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교회도 개척했다. 그해 목사고시에서 성경과목을 패스하지 못해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고 그에 따라 선교사로 파송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후원교회가 없어 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돕는 천사의 손길을 통해 그와 가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

2012년 목사고시에 합격해 2013년 4월 베다니교회에서 개최된 서울남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되어 선교사로 파송받은 이후 교회 사역에도 힘이 붙어 성도 수는 늘었고 예배처소로 사용한 집이 작아 넓은 장소를 임대했다. 드러내고 전도하는 것이 금지된 나라에서 불가능한 일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셨다. 그때 이덕주 교수가 네팔을 방문해 교회에서 설교하고 신학교도 둘러보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힌두교가 깊은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로 힘들다. 눈에 보이는 것을 신으로 섬기는 네팔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신이라고 전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네팔에서의 전도는 더욱 어렵다. 오직 믿음의 눈과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

네팔감리교회는 2011년 공식출범을 하면서 임근화 선교사가 초대 감독을 맡아 8년 동안 수고한 후 2019년 10월 제2대 감독으로 수먼 고우덤이 피선됐다. 그 이전부터 네팔선교에 큰 힘이 되어주던 꽃재교회 김성복 목사가 방문해 축하하고 목회자 세미나도 열었다. 꽃재교회는 네팔신학교 운영을 위해서도 큰 후원자가 되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위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딸 소피아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2024년 감신대에 입학해 공부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2011년 남아공에서 열린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에서 세계감리교협의회(WMC) 회원국이 된 네팔감리교회는 현재 10개 지방 417개 교회 규모로 성장했다. 올해 2월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감리교협의회(AMC)에서 회원국으로 승인받았다. 2011년 수도 카트만두에 설립한 네팔 감리교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BBS 과정(2년), 목회자 자녀 장학금 사업, 청년 사업, 재난구호 사업을 이끌고 있다.

수먼 감독은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기적 같은 하루를 맞으면서 마음 속에 그린다. 네팔의 태양이 솟아오르듯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된 네팔을.

 

격려사를 전하면서 부부에게 손을 잡으라는 이덕주 교수의 '호통'에 손을 잡고 겸연쩍어 하는 수먼 감독과 박옥례 사모
격려사를 전하면서 부부에게 손을 잡으라는 이덕주 교수의 ‘호통’에 손을 잡고 겸연쩍어 하는 수먼 감독과 박옥례 사모
출판감사예배가 열린 감신대 웨슬리세미나실 입구에서 축하객을 맞이하는 수먼 감독과 가족들(수먼 감독 뒤에 보이는 이가 딸 소피아, 그 위 흰색 상의 입을 이가 박옥례 사모)
출판감사예배가 열린 감신대 웨슬리세미나실 입구에서 축하객을 맞이하는 수먼 감독과 가족들(수먼 감독 뒤에 보이는 이가 딸 소피아, 그 위 흰색 상의 입을 이가 박옥례 사모)
예배 사회 전완 목사
예배 사회 전완 목사
예배 기도 원영만 목사
예배 기도 원영만 목사
특송하는 꽃재교회 선교부
특송하는 꽃재교회 선교부
기도하는 참석자들
기도하는 참석자들
김종수 목사의 설교를 경청하는 참석자들
김종수 목사의 설교를 경청하는 참석자들
축도하기 전에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는 태동화 총무
축도하기 전에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는 태동화 총무
포스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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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겨자씨’ 수먼 고우덤 목사 신앙 이야기…”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

네팔의 겨자씨’ 수먼 고우덤 목사 신앙 이야기…”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

  • 2024-10-10 19:07

수먼 고우덤 목사의 책 '수먼 고우덤' 출판 축하예배가 지난 7일 서울 서대문구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열렸다. 수먼 고우덤 목사의 스승인 이덕주 교수(왼쪽)가 수먼 고우덤 목사 부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다. 정선택 영상기자

수먼 고우덤 목사의 책 ‘수먼 고우덤’ 출판 축하예배가 지난 7일 서울 서대문구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열렸다. 수먼 고우덤 목사의 스승인 이덕주 교수(왼쪽)가 수먼 고우덤 목사 부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다. 정선택 영상기자

[앵커]

네팔 흰두교 브라만 출신 외국인 노동자에서 네팔 감리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먼 고우덤 목사의 신앙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에 와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수먼 고우덤 목사를 만났습니다.

송주열 기자의 보돕니다.

 

[기자]

네팔 힌두교 신자로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 출신의 수먼 고우덤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지난 1991년 스무살에 한국에 와 외국인노동자로 고달픈 삶을 시작합니다.

임금 체불에 시달려야 했고, 고된 삶에 지쳐 자살까지 시도했습니다.

그런 수먼 고우덤 목사를 일으켜 세운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계속됐습니다.

다니던 공장에서 취업비자를 만들어주지 않아 불법체류자로 몰리기도 했고, 1998년 비자 만기로 고향에 돌아갔을 때는 개종했다는 이유로 배척과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회유에도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수먼 고우덤은 많은 이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2003년 감신대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10년 만인 2013년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인터뷰] 수먼 고우덤 목사 / 네팔 세계선교교회
“한국에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데요. 여러분 헌신 덕분에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됐고요. 자기의 삶을 뒤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구요. 앞으로 더 잘 살 수 있는 주님 앞에 헌신할 수 있는 저와 독자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가 목회를 시작했는데 순탄치 않았습니다.

2015년 네팔 대지진과 2020년 코로나 펜데믹은 목회자로서 커다란 시험대였습니다.

결국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수먼 고우덤 목사는 지난 2011년 교회 개척 이후 지교회 9곳을 개척했고, 2019년 네팔 감리교의 2대 감독으로 선출 돼 10개 지방 417개 교회의 성장을 돕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수먼 고우덤 목사는 자신의 신앙스토리를 담은 책을 출간하고 네팔에서 핍박을 받으며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사명의 길을 계속 걷겠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수먼 고우덤 목사 / 네팔 세계선교교회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어떻게 한국까지 오게 하고 어떻게 신학공부를 하게 하셨고 어떻게 저를 사용하고 계시는 지 저를 어떻게 네팔을 위해 쓰고 계시는 지 그 내용들을 정리했구요.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하나님 위해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책 ‘수먼 고우덤’ 출판 감사예배에는 지난 20년동안 네팔의 겨자씨로 성장한 수먼 고우덤을 도운 교회와 신학교 동기 등 3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예수를 닮겠다는 열정 하나로 모진 역경을 이겨 낸 제자의 모습이 감격스럽다”며, “한국교회가 지난 20년동안 고우덤 목사란 겨자씨를 심고 나무로 키웠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덕주 교수 / 감리교신학대
“거기 수없이 많은 네팔의 감리교인들, 이제는 수먼 감독님이 그들을 겨자씨로 만들어가는 사역이 감독님의 사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이뤄진 겨자씨의 기적이 네팔 땅에서도 이뤄질 수 있도록 그런 꿈을 우리에게 주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네팔 선교의 겨자씨가 된 수먼 고우덤의 신앙이야기가 신앙과 동역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CBS뉴스 송주열입니다.

영상기자 정선택
영상편집 김성령

https://christian.nocutnews.co.kr/news/6225492

예수기도 북토크 100분 풀영상! 박경조 주교, 김기석• 이민재 •김효경 목사가 함께 하는….

“예수기도” 북토크 100분 풀영상! 박경조 주교. 김기석. 이민재. 김효경 목사가 함께하는… – 당당뉴스 (dangdangnews.com)

 

“예수기도” 저자 이민재 목사와 함께하는 “예수기도” 이야기 북콘서트가 2024년 9월26일 오후6시-8:30 공덕감리교회 공감홀에서 신앙과지성사 주최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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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복음화 위한 20년 외길… 한국교회 은혜로 가능했죠” [출처] – 국민일보

“네팔 복음화 위한 20년 외길… 한국교회 은혜로 가능했죠”

입력:2024-10-09 03:04

브라만 출신 외국인 노동자에서
네팔 감리교 감독된 수먼 고우덤 목사

수먼 고우덤 목사 부부가 7일 서울 서대문구 감리교신학대에서 열린 자서전 출간 예배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네팔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 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네팔 감리교 감독이 됐다. 주인공은 수먼 고우덤(52) 목사로 1991년 스무 살 나이로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급여 연체를 일삼는 일부 악덕 업체 탓에 일자리를 옮기던 중 기독교를 접했다. 이후 네팔 복음화를 위해 한 신학대에 등록해 주경야독하다가 비자 문제로 98년 고국으로 돌아갔다. 현지에서도 한국인 선교사를 도와 영성원을 짓던 그는 영성원 건축을 후원한 세신감리교회의 인연으로 2003년 감신대 장학생이 돼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외국인 노동자 시절부터 교제하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신학 공부도 원 없이 하는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어려움도 적잖아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벅찼다. 고우덤 목사는 “이덕주 감신대 은퇴교수가 손잡아 준 덕에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이 교수는 캄보디아 몽골 베트남 일본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온 유학생 10여명이 속한 ‘겨자씨’란 기도 모임을 지도하며 이들의 학교생활을 도왔다.

 

그는 이렇게 감신대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거쳐 미국 웨슬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2011년 네팔에 세계선교교회를 개척한 이후 지교회 9곳을 세웠고 2019년 네팔 감리교 감독으로 선출됐다. 네팔 감리교신학교 총장이기도 한 그는 현재 신학 교육과 재난 구호 및 목회자 자녀 장학금 지원 등에 힘쓰고 있다.

 

고우덤 목사는 7일 “각종 직함보다 ‘예수의 좋은 제자’로 기억되고 싶다”며 “내 욕심은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드러내고자 앞으로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그의 인생 역정과 네팔 사역이 담긴 ‘수먼 고우덤’(신앙과지성사)도 펴냈다.

 

글·사진=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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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28380657

할아버지 꿈꾸던 광복 이룬 코리아 자랑스러워

“할아버지 꿈꾸던 광복 이룬 코리아 자랑스러워”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 한국 찾아 건국포장 대리 수훈

 

 

 

 

 

우리암 선교사의 4대손 그라프톤 윌리엄스(왼쪽)씨와 3대손 알프레드 윌리엄스(가운데)씨, 델리 윌리엄스(오른쪽)씨를 14일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만났다.

 

아들 이름을 광복이라고 지을만큼 대한민국의 해방을 꿈꾼 미국인 선교사의 업적이 조명됐다.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미국인 우리암(Franklin E. C. Williams, 1883~1962) 선교사와 아들 우광복 선생(George Z. Williams, 1907~1994)의 후손들이 한국을 찾았다.

사단법인한국선교유적연구회(회장 서만철 박사) 산하의 우리암·우광복선교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에 이어 우리암 선교사의 후손들을 한국에 초청했다. 올해는 우리암 선교사에 대한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의 건국포장 수훈을 계기로 방한이 이뤄졌다. 10명의 후손이 대리 수훈을 위해 지난 11일 입국했다. 14일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과 우리암 선교사의 3대손인 델리(Delee Willams)씨와 알프레드(Alfred Willams)씨, 4대손 그라프톤 윌리암스(21·Grafton Addison Willams)씨를 만났다.

우리암 선교사는 충남 공주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1909년 영명학교를 세우고 독립유공자 유관순 열사를 키워낸 인물이다. 1906년 공주로 온 이후 1940년 강제 추방될 때까지 34년간 공주를 비롯한 충남 지역에서 교육과 선교를 전개했다.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을 지낸 조병욱 지사와 유관순 열사의 오빠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우석 지사 등이 영명학교 출신이다.

우리암 선교사는 한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첫아들 조지의 이름을 우광복으로 짓기도 했다. 우광복 선생은 14살에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의 광복 소식을 듣고 돌아와 군의관으로 자원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을 했다. 서 회장은 “미 군정에서 일할 50명의 한국인을 선발할 때 우광복 선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선발된 50명 가운데 35명이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암 선교사의 3대손 델리씨는 자신이 기억하는 할아버지 우광복 선생의 모습을 회상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14살까지 살았던 우광복 할아버지는 본인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컸다”며 “제가 어렸을 때까지도 한국과 미국의 경제 격차가 매우 컸다. 할아버지는 당시 한국의 상황과 관계없이 한국인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열정적인지를 알려주셨다”고 소개했다.

우광복(사진 오른쪽) 선생과 손자들. 사진 가장 왼쪽이 델리 윌리엄스씨, 우광복 선생 바로 앞이 알프레드 윌리엄스씨다. 델리 윌리엄스씨 제공

 

델리씨의 동생 알프레드씨는 “한국에 오자마자 할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 단번에 이해했다”며 “할어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에 대해 알리기 위해 무척 노력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윌리엄스라는 이름이 미국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인데 지난해에 이어 이렇게 한국에 오면서 우리 가족들이 윌리엄스라는 이름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며 “우리 조상의 업적을 발견하는 일에 한국교회가 나서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우리암 선교사의 4대손 그라프톤씨는 “지난해 한국에 오기 전까지 선조들이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룬 분들인지 몰랐다”며 “한국이 광복을 이룬 뒤 이렇게 발전하고 교회가 많이 세워져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됐다는 점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라프톤씨는 “더 늦기 전에 선조들의 업적을 배우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며 “할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해서 자녀들에게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엘프레드씨는 “공주에 우리암 우광복 기념 박물관 건립이 논의되고 있다고 들었다”며 “예산이 많이 들 텐데 우리 가족도 그 일에 어떤 모양으로든 이바지하며 선조들의 한국 사랑을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해 우리암 선교사 후손 한국 초청 행사에서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 알프레드 윌리엄스씨 제공

 

한편 15일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에게 직접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윤 대통령은 “1908년 입국한 미국인 선교사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선생은 충남 공주에 영명학교를 설립한 후 30여 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며 “1943년 인도 전선에서 광복군의 한·영 연합 작전을 도왔고 광복 직후엔 미 군정청의 농업 정책 고문으로 발탁돼 활동했다”고 업적을 소개했다.

서만철 회장과 임연철 전 국립극장장이 지난해 펴낸 책 ‘우리암과 우광복 이야기'(밀알북스)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8567297

“6·25전쟁, 한국만 아닌 자유주의 승리 위한 싸움”… 그의 사기 고취로 참패 피했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비망록 ‘한국전쟁’
미군 시선으로 본 한국전쟁, 56년 만에 번역
여성 종군기자 히긴스, 선교사 포로 젤러스 등
한국전쟁 다룬 책 잇따라 출간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무엇보다 전투의지 회복과 자긍심 고취가 시급하다고 봤다.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가 전방지휘소를 방문해 야전 지휘관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리지웨이는 이후 유엔군사령관까지 오른다. 플래닛미디어 제공

 

 

“마침내 대규모 포성과 함께 한반도에 전면전 발발 신호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우리가 탄생시킨 약소국 대한민국은 자신들이 저항 시늉만 할 뿐 싸울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도 상호 지원한다는 과거 합의를 이행할 수 있는 군사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6·25전쟁을 이끈 매슈 리지웨이(1895~1993) 유엔군사령관은 자서전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 영웅 맥아더,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에 견줘 명성이 특출나지는 않다. 그러나 3년간의 한국전쟁 중 2년가량 군을 이끌면서 한반도 적화통일을 저지하고 휴전선 위치까지 전선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지휘관이 그다. 리지웨이가 1967년 출간한 한국전쟁 징비록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이 출간 56년 만에 뒤늦게 번역됐다. 전쟁터를 누빈 여성 종군기자,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던 미국인 선교사가 쓴 한국전쟁 책도 전쟁 발발 73년, 정전 70년을 기념해 출간됐다.

 

매슈 B 리지웨이 지음ㆍ박권영 옮김ㆍ플래닛미디어 출판·355쪽ㆍ2만5,000원

리지웨이가 1950년 12월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할 당시 상황은 최악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유엔군은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한동안 북진을 이어갔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며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뺏기고 남하했다. 국군·유엔군에서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힘들다는 패색이 짙었다. 미군·유엔군에서는 “왜 우리가 낯선 땅에서 싸우다 죽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리지웨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사기를 고취하는 것이었다. 1951년 1월 21일 전 장병에게 지휘 서신을 내려보낸다. “이것은 동맹국 한국의 자유와 국가 생존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다. 어떤 군 사령부도 우리보다 더 큰 도전을 하거나 우리 자신과 국민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을 때 리지웨이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펴낸 플래닛미디어 이보라 편집장은 “한국전쟁은 우리의 전쟁인데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과오는 온데간데없고 이념만 남아 있다”며 “미국 입장의 책이지만 우리가 전쟁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또 승리를 이끌어내기까지 어떤 감동적 과정이 있는지 읽을 수 있는 역작”이라고 했다.

 

미국 뉴욕 헤럴드트리뷴 소속 기자였던 마거릿 히긴스가 한국전쟁을 취재하고 쓴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의 표지들. 히긴스는 이 책으로 여성으로선 최초로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에서 수상했다. 오른쪽은 히긴스가 맥아더 장군과 대화하는 모습. 아마존 캡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1920~1966)가 지은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은 전쟁의 긴박함과 참상을 생생하게 전한 책이다. 뉴욕 헤럴드트리뷴 도쿄지국장이던 히긴스는 전쟁이 나자 이틀 만인 6월 27일 서울로 날아왔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한강 인도교 폭파·낙동강전투·인천상륙작전·서울수복 현장을 직접 목격한다. 서울수복 이후 명동성당을 찾은 후엔 이렇게 썼다. “성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십자가는 제단에서 떼어졌으며 대신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이 우리를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공산당 본부로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히긴스는 “미국은 이 전투를 사전 준비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고 미국을 비판했다.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본국이 전쟁의 참상을 알아야 병력과 물자를 원활히 공급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을 향한 히긴스의 평가는 이렇다. “전쟁 중 한반도에서 많은 비극이 발생했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것이 자유세계를 위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우리는 지금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종의 국제적인 자명종 시계 역할을 한 것이다.”

 

임연철 번역ㆍ밀알북스 발행ㆍ372쪽ㆍ2만5,000원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포로를 그린 그림. 상하이 사립 미술관인 룽(龍)미술관에 전시됐다. 연합뉴스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래리 젤러스(1922~2007)가 쓴 ‘적의 손아귀에서’는 전쟁이라는 혼돈에 빠진 민간인의 고통과 절망을 알려주는 저술이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당일 북한군 포로가 돼 3년 전쟁기간 내내 인권을 유린당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 공군 무전병으로 참전한 경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국군·유엔군의 북진으로 한겨울에 북한 만포와 중강진 일대를 도보로 올라가는 ‘죽음의 행군’을 시작한다.

추위, 굶주림, 북한의 즉결 처분으로 미군 포로 700명 중 500여 명, 민간인 포로 75명 중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젤러스와 함께 살아남은 민간인 포로 50여 명은 모스크바를 통해 귀국했고, 미군 포로는 겨우 250여 명만 생존해 휴전협정 후 석방된다. 번역자는 후기에 이렇게 썼다. “조명되지 못하고 묻혀 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잊혀 가는 내한 선교사의 숭고한 업적을 한 분이라도 더 발굴해야 한다.”

정지용 기자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62509250000122

정전 70주년… 한국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정전 70주년… 한국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의 6·25 회고록
당시 北포로였던 미국 선교사 수기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 박권영 옮김 | 플래닛미디어 | 356쪽 | 2만5000원

 

 

적의 손아귀에서
래리 젤러스 저 | 임연철 편역 | 밀알북스 | 372쪽 | 2만5000원

“한국군에는 북한군처럼 중국에서 전투 경험을 쌓고 돌아온 인적 자원들이 거의 없었으며, 현대 전투 수행 방식에 대해 교육받은 인원들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무엇보다 한국군 내에서는 ‘체면’이 가장 중요했다. 한국군 장교들은 자신들보다 계급이 낮았던 미군 고문관들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별세한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한반도의 6·25전쟁에 참전한 매슈 리지웨이(1895~1993) 장군의 회고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군은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군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을 폄훼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남한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하고 가정에 헌신적이었다. 한국군에게 부족한 것은 싸우려는 의지나 용기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체계적이고 강한 훈련과 훌륭한 리더십이 너무도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6·25 발발 73주년과 정전 70주년을 맞아 미국인의 시선으로 6·25전쟁을 본 회고록 두 권이 출간됐다.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해임 이후 유엔군사령관에 오른 리지웨이 장군의 6·25전쟁 회고록이고, ‘적의 손아귀에서’는 전쟁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된 미국인 선교사의 수기(手記)다.

리지웨이는 건조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우리가 간과해 왔던 전쟁의 중요한 지점을 짚는다. 그가 통탄한 것은 한국군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1951년 1월 1일 아침에 서울 북쪽에서 마주친 미군 장병들은 개인 소총과 공용 화기를 모두 버리고 사색이 된 채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중공군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리지웨이가 보기에 한반도에서 제대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자폭탄과 유엔을 믿은 미국은 심리적으로 안주한 채 성급하게 군사력 단축을 단행했고, 설사 전쟁이 발생해도 쉽게 이기리라 생각했다.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둔 1950년 12월, 더글러스 맥아더(앞줄 오른쪽) 사령관과 함께 전장을 순시하는 매슈 리지웨이(앞줄 가운데) 장군. 리지웨이는 회고록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를 반복적으로 무시한 끝에 해임된 맥아더를 비판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리지웨이의 역할은 패배주의가 만연한 미 8군을 효과적으로 이끄는 일이었다. 예하 부대 지휘소를 방문해 장병들의 태도와 대화 내용, 행동을 통해 그들의 전투 의지를 들여다봤고, 전투의 의의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어떤 경우라도 고립된 부대를 버리지 않고 고국으로 데려간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전투 의지를 고취하고 위력 수색과 공세 작전을 펼친 끝에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38선 이북까지 회복해 한반도의 적화 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리지웨이는 지휘 서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자유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서구 문명의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물리칠 수 있느냐, 아니면 포로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시민들을 노예로 만들며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리지웨이의 말이 거짓말이거나 과장이라 의심된다면 ‘적의 손아귀에서’를 읽어볼 만하다. 개성 송도중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래리 젤러스(1922~2007)는 6·25 발발 당일 북한군의 포로가 돼 평양의 수용소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북한군은 민간인 포로 75명을 미군 포로 700명과 함께 평북 만포로 이동시켰는데, 북진 속도가 빨라지자 만포부터 더 북쪽 길을 한겨울에 걷게 하는 ‘죽음의 행군’이 시작됐다.
대부분 여름에 붙잡혀 얇은 옷밖에 없는 포로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의 한파 속에서 200㎞ 산길을 걷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미군 포로 낙오자 중 인민병원으로 보내준다고 속인 뒤 사살한 인원만 200여 명이었다. 결국 미군 포로 약 500명과 민간인 포로 20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아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통해 귀국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고통을 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는 사라졌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제도를 향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통제하는 제도일 뿐이다.”

유석재 기자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3/06/24/3MLGKAFF2NEGTLE4MSXOQK7WQA/

휴심정 뉴스(조현 기자)–미국 브루더호프 공동체 생활 15년…푸른 초원위 사랑·배려의 삶 있더라 ​

반하트-스포츠맨십의 전도사

스포츠를 통한 복음 전도사,

반하트

 

이가람 경상국립대학교 체육교육과 부교수

 

 

한국 스포츠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에게 반하트는 익숙한 이름이다. 필자 역시 YMCA와 스포츠의 연계과정을 주제로 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반하트라는 이름을 매우 많이 접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그의 이름을 이 책을 통해 다시 조우하면서 잠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반하트는 한국 근대 스포츠의 아버지로 통한다. 그는 한국 근대 스포츠의 요람인 ​YMCA가 최초로 초빙한 한 체육지도자로서 일제강점기 한국사회에 근대 스포츠가 발아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주체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전수한 농구와 배구 등의 각종 근대 스포츠는 한국 청년들이 일본과 대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YMCA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한국인들이 잠시나마 울분을 표출할 수 있게 해 주는 원천이었다. YMCA에서 근대적인 스포츠 활동을 배운 한국 청년들이 운동장에서 공정한 규칙에 따라 일본과 대결하고 일시적인 승리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YMCA는 국제적인 기독교 단체로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일본의 통제와 눈을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하였고, 그곳에서 반하트는 한국인들에게 근대 스포츠를 직접 가르치고 전수하면서 한국 사회의 근대 스포츠를 통한 문명화에 앞장섰다. 반하트는 근대화된 신체 문화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에 YMCA에 체육지도자로서 한국 청년들에게 신체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스포츠를 통해 젊은이들의 남성다움을 고취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스포츠는 신체적인 언어이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러 온 선교사들은 새로운 문화와 언어적인 문제에 시달렸다. 그 과정에서 스포츠는 서양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을 친화적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한국 야구의 시발점이 YMCA 야구단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예증한다. 야구는 한국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낯선 교회로 걸어가는 복음 티켓으로 이용되었다.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다양한 근대 스포츠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 향유되고 있는 주된 스포츠가 되었다. 농구와 배구도 반하트가 주축이 되어 YMCA를 통해 한국에 도입되었고, 현재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 문화로 자리잡았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교회와 스포츠가 결속된 연유는 바로 스포츠가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최초의 YMCA 체육지도자였던 반하트의 생애를 정리한 책 『반하트: 스포츠맨십의 전도사』는 한국 교회사와 근대 스포츠의 결속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선교사들에 관한 연구는 많이 축적되어 왔다. 하지만 아직도 은둔의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건너온 수많은 선교사들이 펼친 숨은 사역의 발자취가 연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 한 분야가 바로 YMCA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문명화와 복음적 사명을 실천한 선교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히 스포츠를 통한 문명화와 전도를 이룩한 미국YMCA 선교사들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절실하다. 미국YMCA는 초창기 영국YMCA와는 달리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기독교 확장을 위한 핵심적인 매개체로 활용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YMCA 체육 사업을 주도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저서는 YMCA 선교사들의 역사적 연구를 위한 새로운 지평과 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저술한 임연철 박사는 반하트의 삶을 4부로 구성하고 있다. 1부 "체육선교사 준비기"에서는 한국으로 건너오기 전 반하트의 성장과 결혼 과정에 대한 삶을 기록하고 있다. 반하트는 어린 시절부터 야성적인 에너지를 소유했다는 점에서 체육선교사가 되기 위한 선천적인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대학 시절에 농구팀의 선수와 대학 YMCA의 위원회를 경험하며 YMCA 체육지도자로 일할 수 있는, 영적∙신체적∙정신적으로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 농구는 YMCA가 발명한 스포츠 문화이다. 반하트가 학창 시절 YMCA가 창안한 스포츠 문화를 기반으로 스포츠 복음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가슴 속에 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2부에서는 YMCA 체육부 지도자로 내한한 반하트의 초창기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1916년은 한국 스포츠사에서 중대한 해이다. YMCA 가 한국 최초로 실내체육관을 개장하며 동시에 본격적으로 스포츠를 보급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시기로, 이를 통해 스포츠의 대중화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체육 교육을 전담할 책임자 반하트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반하트는 한국에 올 때 짐 속에 "농구공 1개, 야구공과 포수용 글러브 각 1개, 배구공 1개, 그리고 치료가 불가능한 스포츠 사랑 정신"을 함께 가지고 왔다.(85쪽) 스포츠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YMCA 지도자로서 내한 이후에 빠르게 한국어를 습득하면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동시에 거의 모든 운동 종목을 직접 코치하고 운영함으로써 체육 활동의 발전과 보급에 앞장섰다.

 

반하트를 통해 한국인들은 강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체육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반하트는 스포츠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활용되는 것을 넘어 스포츠를 사회적 개혁의 매개체로 인식했다. 그는 공정한 규칙 아래 건전하고 질서 있는 행동을 추구하는 스포츠 활동을 통해 문명화된 사회를 추구하고자 했다.(121~123쪽) 두 아들을 잃는 역경 속에서도 그는 청소년교육, 실업교육, 농촌교육 등에 헌신하며 한국 사회의 개선과 진보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3부 "한국 봉사 후반기(1930~1940)"에서 저자는 서울YMCA 협동총무인 브로크만을 대신해 한국YMCA의 미국 측 책임자 활동을 수행한 반하트에 주목했다. 반하트는 이 기간에 한국 사회가 직면한 편향된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우려하며 YMCA가 영적으로 나라를 붙잡고,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출구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천명했다.(199~200쪽) 국가적 위기를 하나님 신앙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반하트는 서양 근대 스포츠와 함께 씨름과 같은 전통 스포츠를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저자는 이 시기 반하트가 체육활동 이외에도 근대화된 공업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국 지역사회의 문명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흔적을 추적했다. 이를 통해 반하트가 일제강점기 근대적인 공업 및 농∙ 축업 기술과 경제관념을 직접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생활 개선과 발전을 이룬 숨은 공로자였음을 알 수 있다.

 

4부에서는 반하트의 퇴거와 방콕에서의 활동을 다루고 있다. 반하트는 전운이 감도는 식민지 공간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자는 반하트가 한국에서 퇴거한 후의 삶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미국에 도착한 반하트는 잠시 휴식도 없이 하나님의 부름이 있는 태국으로 홀로 향했다. 위험한 발걸음이었다. 태국은 일본 제국의 야욕 속에 점령된 극동의 또 다른 공간이었고, 반하트는 일본의 탄압 속에서 젊음과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총성이 오고 가는 급박하고 위험천만한 공간에서도 반하트는 YMCA 총무로서 피난민 구제사업, 응급사업, 위생사업, 체육 활동 등을 주도하며 인류를 위한 선한 사명을 실천했다. 스포츠를 통해 다져진 남성다운 기독교인의 기질을 끝까지 유지하고 실천한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스포츠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YMCA 선교사들이 전개한 복음 사명의 과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YMCA는 극동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에 동아시아의 기독교적 사랑과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식민지 한국 사회에서 YMCA 문명과 교육을 위한 유일한 공간으로 가능했고, 그중에서도 체육 사업은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가장 유용한 다리였다. 반하트는 스포츠 복음의 설계자이자 실천가였다. 이 책은 저자의 집요한 사료 수집과 철저한 사료 검증을 통해 잊혀질 수도 있었던 반하트와의 역사적 대화를 실증적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평소 일제강점기 선교사들의 삶을 존경해 선교사 생애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고 있는 저자의 끊임없는 발품이 일구어낸 소중한 문헌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지만, 반하트라는 열정적인 스포츠 복음 전도사가 없었더라면 스포츠에 기댄 한국교회의 확장도 더딘 행보를 했을 것이며, 일제강점기 근대 스포츠의 발아도 미진했을 것이다. 스포츠의 묘미는 자발적 실천에서 나오는 즐거움에 있다. 필자는 이 책 속의 반하트를 보며 그가 복음 전도 과정에서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이끌려 스스로 온 극동에서 스포츠를 통해 즐거운 복음을 실천했다고 믿는다.

 

 

 

이가람 스포츠 문화사를 전공하였다. "미국 YMCA 역사에 숨겨진 아이러니: 교회의 세속화인가? 스포츠를 통한 복음화인가?", "Philip L. Gillett의 한국근대스포츠 발전에 미친 영향"등의 논문이 있다. 경상국립대학교 체육교육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Asian Journal of Physical Education 편집위원, 한국체육사학회 국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사상 2022년 3월호(164~169 페이지)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

평신도에게 위임하고, 소그룹으로 섬겨라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 유성준 대표

유성준 교수는 협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2005년 당시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평단)를 출판하여, 1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하던 유 목사에게 큰 영향을 준 세이비어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는 “1947년 고든 코스비 목사가 워싱턴 북쪽의 빈민 지역 아담스 모르간(Adams Morgan)에 설립한 교회로, 영성(Inward Journey)과 사역(Outward Journey)의 균형을 강조하며 철저한 입교과정과 훈련과정을 정하고 지키며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이다. ‘세이비어(savior)’는 기독교에서는 ‘구세주’를 일반적으로는 ‘구제하는 사람’을 뜻한다.

유성준 교수는 23년의 미국 이민목회를 마치고 귀국한 후 15년간 협성대학교 교수와 교목실장으로 봉직했다. 2015년부터는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을 세우고 지금까지 대표로 활동하며, 한국교회에 세이비어교회의 사역과 핵심철학을 전파하데 힘쓰고 있다. 올해 초에는 한국교회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곁들여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신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미국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등 소위 한국교회가 모델로 삼았던 많은 교회들이 사라지고 격변을 겪는 교계 현실 속에서, 오늘날 팬데믹으로 신앙의 지형이 완전히 변해버린 한국교회 상황에서 과연 세이비어교회 이야기가 아직도 유효할까. 연희동에서 유성준 교수를 만나 직접 들어보았다.

 

대표님의 신앙여정이 궁금합니다.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원주 51수송병원에서의 군대생활이다. 1976년 강원도 신림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에 군인들을 위한 교육 위생병으로 파견되어 한 달간 농군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영성이 중요하지만,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처럼 복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도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이것이 내 평생의 소명이자 신앙관이 되었다. 제대 후 입학한 협성신학교에서 김찬국 교수님을 만나 ‘정통실천신학 Theology of Ortho-praxis’의 중요성을 배웠다. 1981년 가을에는 협성신학교 첫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오클라호마 필립스신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는다. 1985년 여름학기에 마지막으로 공부한 ‘청지기의 삶에 대한 과정Stewardship in Local and Global Context’을 통해 도심지 빈민가와 부유층이 사는 지역들을 두루 방문하면서, 크리스천이 세상을 위해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이애주 사모와 동역하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 교회에서는 사례를 받지 않는 자비량 목회를 하기도 했다. 게렛신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워싱턴제일교회에서 목회했다. 1994년 세이비어교회를 처음 방문하면서, 내가 신학을 공부하며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던 목회를 실제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교회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세이비어교회 산하 서번트리더십학교(The Servant Leadership School)에서 10년 간 공부하면서 핵심철학 다섯 가지를 배웠는데, 성경, 소명, 공동체, 영성과 기도, 마지막이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는 삶이다. 나는 이 핵심철학이 감리교회를 시작한 ‘웨슬리Wesley’의 ‘실천적 경건’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사역의 조화이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강조한다. 이 두 가지가 세이비어교회에서는 통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책을 낸 계기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세이비어교회의 설립자 고든 코스비 목사님을 직접 만나보기도 하고, 워싱턴 빈민가에서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큰 도전을 받았다. 2004년 모교인 협성대학교에 교수로 부름을 받아 한국에 오게 되면서 1년 동안 준비해 쓴 책이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양적 팽창, 외형에 치우침, 개교회 중심주의, 내부 지향적 체제 그리고 목회자의 명예욕과 재물욕 등 여러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 새롭고 올바른 교회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세이비어교회를 소개한 것이다. 이번에는 코로나 상황까지 겹치면서,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요청하여 『유성준 교수가 새로 쓴 세이비어교회 이야기』(신앙과지성사)를 출간하게 되었다.

 

세이비어교회도 75주년을 맞았습니다. 고든 코스비 목사의 은퇴와 소천, 사회상의 변화 등을 겪으면서도 그 탁월함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코스비 목사가 은퇴한 후 세이비어교회는 후임자를 정하지 않고 오히려 본부교회를 해체했다. 그동안 함께 사역하던 10개의 지교회 형태 사역공동체를 독립시켰다. 코스비 목사가 평소에 이야기 해오던 대로 “내적인 영성, 영성의 표출로서의 외적인 사역, 그리고 사랑과 책임 있는 공동체에 중점을 둔 작지만 밀도 있게 헌신하는 훈련된 사람들의 모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세이비어교회의 평신도 숫자는 150명을 넘긴 적이 없다. 세이비어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루 한 시간 성경 읽고 기도하기, △2,3년이 소요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학교와 서번트리더십학교 훈련과정 참여하기, △온전한 십일조헌금 드리기, △소그룹 미션그룹 모임에 매주 참여하기, △45가지 지역사회 사역 중에 은사별로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기, △자신의 삶의 전 지경을 포함하는 영적 자서전 쓰고 공동체에 발표하기 등의 까다로운 과정을 따라야 한다. 이런 입교과정은 일회성이 아니라 매년 갱신해야 한다. 세이비어교회는 지금도 △빈민 청소년을 위한 자원봉사자들의 일대일 멘토링과 과외 프로그램, △매년 천여 명 실업자들을 훈련시키고 취업시키는 취업사역, △미국 유일의 노숙자 병원인 그리스도의집,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복지사역, △마약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사마리아인 여인숙 주거 사역 등 지역에 꼭 필요한 45가지 관련 사역들을 펼치고 있다. 고도로 훈련된 평신도들의 소명과 동역 덕분에 또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지금도 그 사역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유성준교수TV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C%9C%A0%EC%84%B1%EC%A4%80%EA%B5%90%EC%88%98tv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철저한 영성과 지역사회 사역의 균형을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실현하는 세이비어교회의 서번트 목회를 대안으로 제시해 왔다. 신학을 가르칠 때도 그 지역과 현실에 맞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국 워싱턴 빈민가에 최적화된 세이비어교회의 사역을 그냥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맞게 재해석해서 제공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국교회 상황 가운데 적용 가능한 보다 실제적인 사역 매뉴얼에 집중했다. 이제는 이론으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적용하고 변화해야 한다.

 

한국에도 세이비어교회처럼 서번트리더십을 실천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사회복지와 기독교 복지는 다르다. 기독교 복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아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내 안에 영성이 가득 차고 흘러넘쳐야 사역으로 드러날 수 있다. 고든 코스비 목사가 주장한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사역의 조화’도 같은 말이다. 지금은 교회를 개척해도 아무도 교회를 찾지 않는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 개척’이 아니라 ‘사역의 개척’이다. 일부 목사님들이 말하는 ‘마을목회’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지역의 필요를 중심으로 사역을 넓혀 나가는 세이비어교회의 사역과 다르지 않다. 이번 책에도 내가 임원으로 동역하고 있는 탈북민 자활을 위한 사회적 기업 ‘위로재단’ 이 펼치는 다양한 사역 등 실제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나아가 책의 성격상 소개하지 못했지만, 세이비어교회를 모델로 한국의 상황에 맞게 목회하는 교회도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부천의 김 목사 부부의 경우, 미국 세이비어교회를 방문하고 서번트리더십학교를 이수한 뒤 2003년 선한공동체를 시작했다. 청소년을 위한 주거공동체 및 밥차 사역 등을 해오고 있다. 앞으로 서번트 목회를 하는 교회와 목회자, 평신도를 소개하는 책도 준비하고자 한다.

◇ 40여 년 동역해온 유성준 목사와 이애주 사모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교회는 목사 중심이다. 세이비어교회의 사역은 평신도가 주축이 된다. 서번트 리더십이 교회의 목표 철학이 되어야 하는데, 그 핵심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위임’이다. 목사의 권한을 훈련시킨 교인들에게 위임해야 하는 것이다. 목사나 교회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소명에 따라 헌신할 수 있도록, 자발적인 소그룹을 만들어 사역할 수 있도록 세워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영성을 가다듬어야 하고 외적 사역을 위한 훈련도 필요하다. 현재 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에서 교육을 받는 분들은 목회자가 많은데, 앞으로는 평신도도 훈련원을 많이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교회가 위탁을 의뢰해도 좋을 것이다. 당장 훈련원을 이용하지 못하더라도 이 책과 함께 <유성준교수TV>(유튜브)를 시청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출처 :이연경 기자(주간기독교)

http://www.cnew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