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여름 캐나다 밴쿠버 인근 로키산맥의 호숫가에서 김애영 교수(왼쪽)와 박순경 교수가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 김애영 교수 제공
‘교수 박순경’ 쫓아다녔던 ‘학생 김애영’ 김애영(62) 교수(한신대 신학과)와 박순경(91) 교수(이화여대 기독교육학과 명예교수)는 함께 산 지 올해로 24년째다. 원래 대학 사제 간이었지만 둘은 이제 모녀관계처럼 혹은 학문적 동지로서 혹은 인생의 동반자로서 함께 산다. 그냥 친해서 같이 사는 동거인이 아니라 물질적·정서적으로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아니,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가족이다.
지난 1일 서울 방배동의 자택에서 이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가족으로서의 삶을 설명했다. 이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족을 꾸리는 것도 좋지만, 지금의 자신들도 충분히 행복하고 가족이 되어 살아온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이들은 말했다.“제가 1971년 이화여대 기독교육학과에 입학했어요. 박순경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정말 인기 많은 분이었어요. 저는 어떻게든 교수님 눈에 띄고 싶어 노력하는 학생이었지요.” 김애영 교수가 대학생 때 박 교수와 첫 인연을 쌓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교수님 지나갈 만한 길목마다 지키고 서서 교수님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3학년 때인가, 한번은 길 가던 교수님을 붙잡고 종교에 관한 질문을 했어요. 갖고 계신 종이를 꺼내서 빼곡하게 뭔가를 적으면서 설명해주셨어요. 너무 멋있게 보였어요. 내가 교수님께 잘 보일 방법이 무얼까 고민했어요. 공부밖에는 방법이 없더군요.” 박 교수도 ‘학생 김애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정말 영민한 학생이었어요. 또래 친구들보다 너무 앞서 나가 질투의 대상이 될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지요.”
박 교수는 1970~80년대 학계에서는 드물게 학생들이 주최하는 통일 관련 행사에 적극 나섰다. 경찰이 찾아와 박 교수더러 학생들 행사에 참여하지 말라고 압박해도 눈치를 보지 않았다.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학생 김애영은 박 교수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박 교수에게 김애영이 단순한 학생이 아닌 특별한 한 사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박 교수가 1978년 다리를 다쳤을 때부터다. 설악산 등반을 갔던 박 교수는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졌다. 병원에서 수술을 한 날부터 김애영이 찾아와 간호를 했다.“발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어요. 피가 안 통해 발가락이 새파래졌어요. 침대에 누워 자다가 잠을 깼는데 애영이가 깁스 바깥으로 아주 조금 나와 있는 제 발가락을 주무르다가 지쳐서 잠이 들어 있는 모습을 봤어요. 감동을 받았어요. 어떻게 이런 학생이 있을 수 있나 싶었지요.”김애영은 이후에도 헌신적으로 박 교수를 위해 일했다. 김 교수가 대학 강사 신분이던 1990년께 박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가정보원(과거 안전기획부)에 붙잡혀갔다. 김 교수는 석방운동을 벌였다. 박 교수는 석달여 만에 풀려났지만 계속 조사를 받아야 했다. 박 교수를 보호하기 위해 김 교수는 박 교수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두 교수는 동거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민법은 가족을 혈연관계나
결혼한 배우자 등으로 한정
그러나 다양한 가족 유형 존재
사제간 박순경-김애영 교수는
24년째 함께 사는 가족이다“서로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가
현대인들에겐 그게 더 중요해요”
두 교수 법적인 가족 되려면
호적 정리 외엔 방법이 없어 “이제 그만 살자”며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박 교수는 아홉 형제의 막내였다. 김 교수는 사형제 중 장녀였다. 이들의 부모는 결혼을 강권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좀 드문 부모의 유형이었다. 두 교수도 남성과의 결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독신주의자는 아니었어요. 다만 당시(1960년대 이전)에는 여성으로서 공부를 계속하는 것과 가정을 꾸리는 것은 양립하기 어려웠어요. 그러다 보니 결혼을 안 하게 됐을 뿐, 특별히 안 하려고 거부한 것은 아니에요.”(박순경 교수)“저도 독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꼭 결혼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여자가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어렵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고요. 특히 보수적인 신학계에서는 그래요. 아버지도 딱히 결혼하란 얘기 안 하시고 그저 내가 행복하게 잘 살도록 응원해줄 뿐이었어요.”(김애영 교수) 그래도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이의 남남이 어떻게 가족을 구성해 사는 것이 가능할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두 교수에게 물었다. 김 교수가 대답했다.“피는 물론 물보다 진하죠. 하지만 거기에만 고착돼선 안 돼요. 사람은 때에 따라 다른 사람이 더 의지가 되고 중요한 관계가 될 수 있어요. 저에게는 제 교수님(박순경)이 그런 분이죠. 교수님과 함께 살면서 저는 인생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서로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가’가 현대인들에게는 더 중요하죠.”생각해보면 그렇다.
나의 비밀, 나의 꿈, 나를 화나게 하는 것,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등을 나의 삼촌, 이모, 부모 혹은 나와 결혼하는 이성만이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란 법은 없다. 평생을 동물복지에 헌신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에게 일상의 관심사는 동물이다. 딱히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자신의 이런 고민과 관심사를 공유하는 누군가가 더 가족같이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박 교수와 김 교수는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통일운동에도 함께 관심이 많았다.
여성이라는 소수자로서 우리 사회에서 여러 부대낌을 느끼며 산다는 것도 두 교수가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였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서로 가장 아끼는 관계가 되었다. 결혼을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구와 살아야 할까. 박 교수와 김 교수는 둘이 함께 사는 게 서로에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둘은 가족이 되었다. 물론 함께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공통점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살다 보면 싸운다. 남편과 아내는 부부싸움을 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다툼이 있다. 박 교수와 김 교수는 어떨까.박 교수가 말했다. “1년에 한두번 정도는 냉랭하게 지낼 때가 있지요. 너무 화가 나서 ‘이제 그만 같이 살자’고 말을 내뱉은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냥 분하니까 소리쳐보는 거지요. 진짜 그러자는 건 아니고요. 한참 싸우다가도 ‘서로에게 스트레스 주면 뭐 하냐. 이러면 안 되지’ 하고 그냥 참아요.” 둘은 아침 산책을 따로 나간다. 김 교수가 설명했다. “박 교수님은 산책도 늘 정해진 코스대로만 다니세요. 정해진 시각에 출발해서 정해진 시각에 딱 맞춰서 돌아오시고요. 저는 그런 게 싫어요. 생각나는 대로 좀 돌아다니는 게 좋거든요.
그래서 같이 산책을 가지 않고 따로 나가요.”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가족끼리 싸우지 않고 오래 같이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요령이다. 두 교수의 생활도 여느 가족들의 사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다만, 두 교수는 법적으로는 가족이 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김 교수가 설명했다. “제 호적을 정리해서 박 교수님을 제 어머니로 지정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하지만 제 어머니는 분명 살아 계시고 저는 제 어머니를 사랑해요. 호적을 정리할 순 없는 것이죠. 그래서 박 교수님과 법적 가족이 되는 걸 포기했어요.” 결국 두 교수는 가족이면서도 법적으로는 그냥 남남으로 살았다.두 교수는 서로의 재산에 대해 상속권을 주장할 수 없다. 만에 하나, 박 교수가 먼저 세상을 뜨고 박 교수의 친족들이 나타나 재산권을 행사하면 김 교수는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다.박 교수는 은퇴해서 현재 소득이 없다. 박 교수는 지역의료보험에 가입돼 있고, 김 교수는 현직 교수여서 직장의료보험에 가입돼 있다. 일반적인 가족이었다면 박 교수는 김 교수의 직장의료보험에 함께 가입돼 있을 것이고, 이중으로 보험료를 내지 않을 것이다.
두 교수는 우리 사회의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희는 사실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것 빼고는 가족으로서 함께 사는 데 큰 불편함은 없어요. 하지만 다른 동거가족들은 국민연금, 의료보험 등에서 불이익을 받고 불편함을 느낄 거예요. 저소득층일수록 그 불편함의 정도는 클 겁니다. 법의 체계가 바뀌어야 합니다.”이제 두 교수는 떨어져서 살 수 없다. 갈수록 몸이 허약해져가는 박 교수는 김 교수가 절대적인 의지 대상이다. 박 교수는 뇌졸중으로 4년 전 쓰러진 적이 있다. 김 교수가 빨리 발견한 덕분에 박 교수는 병원에서 제때 치료를 받았고 현재 큰 후유증이 없다. 박 교수는 혼자 손톱을 깎지 못한다. 김 교수가 도우며 이런저런 작은 불편함을 덜어준다. 김 교수는 기꺼이 자신의 어머니처럼 박 교수를 보살핀다. 박 교수는 그것이 고맙고 익숙하다. 지금은 각자의 방에서 오랫동안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으면 넌지시 살펴보고 돌아가곤 한다. “무슨 변이라도 생긴 건지 걱정되니까 살펴보러 가는 거죠. 애영이는 하늘이 내게 보내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박 교수가 김 교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창밖에 보이는 우면산 자락의 우거진 수풀이 더욱 푸르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