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대부흥과 발전에 기여한
선교사 로버트 하디
김칠성 목원대학교 교수
한국 개신교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없는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성장과 발전의 밑바탕에는 수많은 외국 선교사들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한국 개신교인들의 헌신과 봉사가 있었다. 이렇게 한국 개신교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한 수많은 선교사들 중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1865-1949, 河鯉泳, 하리영) 선교사이다.
하디 선교사는 1903년 원산에서 시작하여 1907년 평양에서 절정을 이룬 한국 대부흥의 주역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하디 선교사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1886년에 시작된 학생해외선교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의 영향으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과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 1890년 조선에 입국하여 8년간 독립선교사(교단 파송을 받지 않은 선교사를 지칭)로 활동했다. 그 후 1898년에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한국 대부흥, 신학교육, 농촌계몽, 문서선교 등 다방면에서 한국 개신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은퇴한 이덕주 교수는 최근 하디 선교사의 전기를 서술한 『영의 사람 로버트 하디』를 펴냈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의 1장에는 하디의 출생과 선교사가 되기까지의 과정(1865-90), 2장에는 독립선교사로 활동했던 8년의 시간(1890-98), 3장에는 한국 부흥을 위해 기여한 내용(1898-1907)이 담겨 있다. 이어서 4장에서는 현재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에서 교수와 교장으로 활동했던 내용(1907-23), 5장에서는 문서선교, 농촌계몽운동, 남북감리교회 연합운동 및 그의 은퇴와 별세를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 6장에서는 하디의 저술(논문과 단행본)과 그의 신학사상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선교사 하디가 다방면에서 한국 개신교 발전을 위해 기여한 내용을 상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다음의 세 가지 내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하디가 처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한국교회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인 저자의 풍부한 한국사 지식은 하디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과 일제강점기에 하디가 내린 결정을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그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저자의 연구는 매우 유용하다.
둘째, 이 책은 다양한 자료의 활용이 돋보인다.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 독립선교사로 시작하여 이후 미국 남감리교 소속으로 한국에서 무려 45년간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가 직접 쓴 글이나 그에 관한 내용이 캐나다, 미국, 한국 등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저자는 해외에 있는 자료뿐만 아니라 오래된 국내 자료도 발굴하여 하디의 생애와 활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특히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국내외 자료들을 발굴하여 소개하였기에, 후대 연구자들이 앞으로 하디를 연구할 때 큰 도움이 되리라 예상된다.
셋째, 이 책에서 사용한 도표들은 독자들이 하디의 활동을 더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 책은 하디 선교사의 생애와 다양한 활동을 세세히 다루었기에, 그 서술 분량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저자는 곳곳에서 도표를 통해 앞서 소개한 내용을 요약함으로써 독자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부록에 실린 ‘하디 연표’는 하디와 그의 가족이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디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연대기적 상황을 병기함으로써 하디의 생애와 활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첫째, 몇 가지 표현상의 오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1) 저자는 “독실한 장로교 집안에서 출생한 펜윅”(77쪽)이라고 그를 소개하며, 그 이후 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40쪽에서 펜윅을 하디, 에비슨과 같은 “감리교 신도들”로 표기한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하디, 펜윅, 에비슨은 모두 캐나다 출신이고, 하디와 에비슨은 감리교 출신이지만(에비슨은 후에 장로교로 소속을 변경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됨), 펜윅이 감리교인인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2) 58-59쪽에서는 학생해외선교자원운동(SVM)의 영향의 일환으로 하디에게 선교적 자극을 준 인물인 존 포어맨(John N. Foreman)을 “목사”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하디의 1914년 혹은 1934년의 글을 기반으로 작성된 내용이다. 하지만 존 포어맨은 당시 목사가 아니었고,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신학교에 갓 입학한 하디 또래의 젊은 신학생이었다. 아울러 67쪽에서 “목사”로 소개한 로버트 와일더(Robert Wilder, 1863-1938) 또한 당시에는 하디보다 두 살 많은 20대의 젊은 대학생이었다. 다시 말해 포어맨과 와일더 둘 다 후에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하디가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 이 두 사람을 목사로 지칭했지만, 하디가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던 1886년에 캐나다에 와서 해외선교자원운동을 펼쳤던 이 두 사람은 당시에 목사가 아닌 20대 청년이었다.
(3) 78-79쪽에서 저자는 펜윅에게 선교적 영향을 미친 “와일더 형제”를 로버트 와일더의 아버지인 로열 와일더(Royal Wilder) 목사(인도 선교사)로 보고 있다. 하지만 “와일더 형제”는 로버트 와일더가 맞다. 왜냐하면, 당시 로열 와일더는 자신의 아들이 대학교를 순회하면서 선교자원운동을 펼치기보다는 자신의 선교잡지 출판사역을 맡아주기를 바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버트 와일더 역시 인도 선교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인도에서의 경험을 이미 무디의 수련회에서 강연함으로써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4) 88쪽과 188쪽에서 저자는 제중원(초기에는 광혜원)을 “국립병원”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서울대학교(국립병원)와 연세대학교(선교병원)가 여전히 논쟁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필자가 보기에는 ‘왕립병원’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둘째, “부흥”이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개념상의 혼란이 보인다.
하디가 한국 개신교에 미친 영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부흥이다. 그런데 저자는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개념을 포괄하거나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특히 “부흥운동”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먼저, “부흥”을 교회의 성장과 번영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276쪽에서는 부흥을 성장과 동의어로, 277쪽에서는 “부흥과 성장,” 그리고 310쪽에서는 “부흥이나 성장”이라고 표현하고, 438-439쪽에서도 “부흥, 성장”, “부흥과 성장”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347쪽에서는 “교인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 규모가 커지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신도와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부흥이었다.”라고 표현하면서, 원산 부흥을 “거룩한 회심운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373쪽에서 하디가 윤성근에 관해 기술한 영어 원문을 번역하면서 저자는 ‘prosper’(번영)를 “부흥”으로 번역하였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오직 교회가 부흥되기만 바랐습니다.”(He loved the Church, and his whole desire was to see it prosper.)
그러나 필자의 이전 연구[“하디의 회개, 부흥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선교신학」 제32집(2013): 175-199]에서 이미 밝혔고, 1923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2월 부흥회 주제가 “성령세례”였듯이, 부흥은 회심(conversion)이나 교회성장(church growth)이 아니라 바로 “성령세례”(Baptism of the Holy Spirit)를 의미한다. 특히 ‘부흥운동’(revival movement, Revivalism)이라는 용어는 필자가 이전의 다른 연구[“원산부흥, 일반부흥인가, 대부흥인가” 「한국교회사학회지」 제34집(2013): 253-283]에서 밝혔듯이, ‘부흥’과는 전혀 다른 “전문적인 대중전도”(professional mass evangelism)(에드윈 오르, Edwin Orr) 또는 “부흥 혹은 회심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안 머레이, Iain H. Murray)으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디가 말하는 부흥은 교회성장이나 회심을 위한 전도운동을 의미하지 않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을 경험한 기존 신자들에게 “성령의 부으심” 또는 “성령세례”가 임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성화된 삶을 살아가며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 있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부흥에 관한 용어를 사용할 때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일반부흥과 대부흥의 차이, 그리고 원산 부흥과 평양 부흥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 관한 필자의 연구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셋째, 네비어스 선교방법에 관한 하디의 입장을 서술한 부분은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저자는 358-359쪽에서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 이후에 토착인에 의한 전도활동(self propagation)과 자립운영(self support)을 언급하면서 “네비어스 선교방법”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네비어스 선교방법론은 감리교에서 채택한 선교방법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디와 연관 짓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하디가 행한 일에 네비어스적 방법론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디가 네비어스의 방법론을 따랐다고 말하기는 어렵기에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에 관해서는 최근에 발표한 필자의 연구[“한국선교 초기 감리교와 장로교의 교회성장 비교연구”, 「선교신학」 제64집(2021): 166-192]를 참고하기 바란다.
은퇴 이후에도 끊임없는 연구와 저술로 한국교회사 분야의 대가의 면모를 보여준 이덕주 교수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많은 후속 연구가 이어져 선교사의 역할모델로서의 하디 선교사, 그리고 한국 대부흥의 도구로 쓰임받은 하디 선교사에 관한 재조명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김칠성|드류대학교에서 신학석사(M.T.S)를, 애즈베리신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교회 130년 역사에 묻고 미래에 답하다』, 『대한민국을 세운 위대한 감리교인』(이상 공저) 등이 있다. 목원대학교에서 선교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사상 2022년 2월호 (172~177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