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주 노동자가 네팔감리교회 감독이 되다

한국 이주 노동자가 네팔감리교회 감독이 되다

 

– 수먼 고우덤 목사 이야기 출판 … 감사예배 드려
– from Nepal Brahmin to Korean Pastor

네팔감리교회 수먼 고우덤 감독의 삶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그려낸 'from Nepal Brahmin to Korean Pastor 수먼 고우덤' 출판감사예배가 10월 7일 감신대에서 열렸다. 예배를 마친 후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에 임하고 있다.
네팔감리교회 수먼 고우덤 감독의 삶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그려낸 ‘from Nepal Brahmin to Korean Pastor
수먼 고우덤’ 출판감사예배가 10월 7일 감신대에서 열렸다. 예배를 마친 후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에 임하고 있다.
감사의 인사를 하는 첫 마디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수먼 감독
감사의 인사를 하는 첫 마디에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수먼 감독

 

외국인 노동자로 한국에 건너와 가구공장과 유리공장 노동자로서 살던 네팔 힌두교 청년이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대학원 과정을 마친 후 목사가 됐다. 더 나아가 목회학박사 학위까지 받고 선교사 신분이 돼 조국으로 돌아가 힌두교의 살얼음판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네팔신학교 교수이자 네팔감리교회의 감독이 됐다. 단순한 나열이지만 그 시간 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역경과 고비가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입술로 고백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도 많을 것이다. 그것들을 글로 표현해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정성으로 엮은 책의 출간을 감사하며 그와 함께했던 이들이 모여 출판감사예배를 드렸다.

10월 7일(화) 오후 1시 감신대(유경동 총장) 웨슬리세미나실에서는 네팔감리교회 수먼 고우덤 감독의 이야기를 엮은 《from Nepal Brahmin to Korean Pastor 수먼 고우덤》 출판감사예배가 있었다. 저자 수먼 감독을 비롯해 감신대 은사인 이덕주 교수(명예교수)와 그의 사역 후원자로 오랫동안 함께한 김종수 목사(세신교회 원로), 서후현 목사(예장백석 아성교회), 신태하 목사(보문제일교회), 박대일 목사(청량리교회), 안호선 목사(안산제일교회) 등이 참석해 설교와 축사, 격려사로 감동을 더했다. 기감 선교국에서도 태동화 총무가 참석해 축사와 함께 축도했으며 그밖에 수먼 감독과 인연을 맺은 여러 지인들이 함께하여 가슴벅찬 시간을 연출했다. 특별히 수먼 감독의 감신대 재학시절과 사역 기간에 든든한 후원자로 동행한 세신교회와 꽃재교회 성도들이 참석해 축하했다.

 

감사예배

축하감사예배는 전완 목사(만민교회)의 사회로 시작해 원영만 목사(양문교회)의 기도, 꽃재교회 선교부의 특송에 이어 김종수 목사(세신교회 원로)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행 13:21~23)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하는 김종수 원로목사
설교하는 김종수 원로목사

 

김종수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개척하여 성장하는 과정에서 해외선교가 큰 역할을 했다며 특히 네팔에 교회와 목회자를 세우는 일에 매진했다고 소개했다. 여러 결실 중에서 귀한 열매로 맺힌 사람이 수먼 고우덤이라며 목회자가 되고 본국 감리교회의 감독까지 됐으니 진심으로 기쁘다고 감회를 전했다. 자신과 세신교회가 열심히 후원했지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한 것에 관해 마음 다해 축하한다고 전했다.

본문의 이야기로 들어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몇 가지 주요한 특징이 있다며 네 가지를 언급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며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면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둘째로,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면 하나님께 인정 받게 돼 쓰임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셋째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신다며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드러내는 믿음의 모습이 되면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부연했다. 이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라며 이 날의 주인공인 수먼 고우덤을 비롯해 함께한 모든 이들이 그 주인공이 되길 축복한다는 말로 설교를 마쳤다.

이어 축사가 이어졌다. 가장 먼저 축사에 나선 서후현 목사(아성교회)는 자신을 예장백석 소속이라고 소개한 후 수먼 감독과 인연을 맺은지 28년 됐다고 언급했다. 백석 교단에서 품을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며 감리교회와 함께해 오늘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음을 축복한다고 덧붙였다. 품는 것의 은총에 관해 성경의 인물, 보아스를 예로 들어 설명한 서 목사는 수먼 감독을 비롯해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 품음으로써 ‘빛나는 보아스’가 되길 바란다고 축복했다.

 

축사를 전하는 서후현 목사
축사를 전하는 서후현 목사
축사를 전하는 신태하 목사
축사를 전하는 신태하 목사

 

두 번째 축사자로 등단한 신태하 목사(보문제일교회)는 자신이 미국에서 목회할 때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서 친구로 만난 사람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소개했다. 수먼 감독을 선교사역으로 만나지 않고 친구로서 만났기에 지금까지 좋은 인연으로 교제하고 있다며 책 출간을 축하하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열어 가시기를 축복한다고 전했다. 계속하여 목회자들은 예수의 제자로서 그를 닮아가는 것이 중요한데 예수처럼 낮아진 곳에서 훈련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 받아 목회자의 삶을 살아가니 의미가 깊다며 그 스토리를 통해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는 통로로 살아가길 축복한다고 전했다.

마지막 축사자인 박대일 목사(청량리교회)는 잠시 책을 읽으며 단기선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고 인연을 소환하면서 책이 인연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통로가 됐다고 언급했다. 수먼 감독은 ‘겉은 네팔인이지만 속은 한국인’이라며 그를 만날 때마다 참된 목회자요 선교사라고 생각했다는 말로 수먼 감독을 소개했다. 수먼의 스토리는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라며 책을 읽는 이들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하고픈 책이라며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했다.

 

축사를 전하는 박대일 목사
축사를 전하는 박대일 목사

 

이어 책을 출판한 신앙과 지성사 대표 최병천 장로가 출판 배경과 과정에 관해 소개했다. 최 장로는 신앙과 지성사가 비록 작은 출판사지만 좋은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나름대로 애쓴다며 ‘올해의 우수도서’에도 다수의 책이 선정된 바 있다고 소개했다. 네팔신학교 도서관에 영어 원서 2만 권 이상을 보내는 것이 선교적 과제라며 현재까지 3천 권을 보냈다고 전했다. 항공발신비도 많이 소요되는데 여러 감리교회들이 연합하여 해낼 수 있었다며 계속해서 양서를 보낼 수 있도록 관심 가져 달라고 안내했다. 수먼 감독의 책은 외국인선교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라며 책을 발간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수먼 감독을 만났을 때 삶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자고 자신이 먼저 제안했다며 사양하는 수먼 감독을 설득했다고 소개했다. 한국말은 어느 정도 하지만 글에는 자신 없다는 수먼 감독에게 정리연 작가(에큐메니안)를 소개해 작업하게 했다며 정리연 작가가 네팔 현지에 2주 동안 머물며 인터뷰하기도 했다고 부연한 후 참석자들에게 정 작가를 소개했다.

 

출판 배경과 경과에 관해 설명하는 최병천 장로
출판 배경과 경과에 관해 설명하는 최병천 장로
격려사는 전하는 안호선 목사
격려사는 전하는 안호선 목사

 

그리고 이어진 격려사는 안호선 목사(안산제일교회 선교담방 부담임)와 이덕주 교수(감신대 명예교수)가 차례로 전했다. 안호선 목사는 수먼 감독과 안산제일교회와의 인연을 언급한 후 수먼 감독의 책은 하나의 이야기(story)로써 삶을 향한 고민과 존재가 들어 있어 힘이 있다고 소개했다. 안산에는 10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있다며 책이 그들에게 귀한 힘과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이 네팔 신학교를 방문하여 60명이 훈련 받고 있음을 봤다며 수먼 감독의 가르침으로 인해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잘 훈련되어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되길 기원한다고 축복했다.

이덕주 교수는 수먼과의 인연이 20년 됐다며 수먼을 비롯해 네팔과 캄보디아 등에서 온 신학생들이 힘들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통해 함께 기도했다고 소개했다. 그들 스스로 모임의 이름을 ‘겨자씨기도회’라고 명명해 기도하면서 마음 속에는 자괴감이 있었다며 그것은 곧 ‘우리는 하잘 것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었다고 전했다. 특히 본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기에 스스로를 겨자씨와 같은 존재로 여긴 듯 하다고 부연했다. 그들에게 성경에서 언급한 겨자씨의 의미를 들려주면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며 그 자부심으로 버텨 지금은 거목이 됐다고 강조했다.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깃드는 거목으로 성장하는데 20년이 걸렸다며 책에는 도움 받은 사람의 이름이 60명 정도 되지만 실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는 갑절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수먼 감독은 이제 네팔의 거목이 되어 겨자씨를 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 우리의 일은 그가 400개의 네팔감리교회들을 관리하고 200명의 졸업생들과 신입생들이 있는 네팔신학교를 잘 이끌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라고 권면했다. 계속해서 그가 네팔에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이룬 교회 성장이 네팔에서도 일어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하고 관련맺어 가야 할 것이라며 특별히 외국인과 결혼해 동고동락한 부인 박옥례 사모를 향해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며 참석자들의 박수를 유도하는 것으로 격려했다.

수먼 고우덤 감독 부부를 불러내 이들과의 인연을 설명하며 격려사를 전하는 이덕주 교수
수먼 고우덤 감독 부부를 불러내 이들과의 인연을 설명하며 격려사를 전하는 이덕주 교수
출판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수먼 고우덤 감독
출판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수먼 고우덤 감독

 

마지막으로 수먼 고우덤 감독이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최병천 장로의 책 발간 제안을 거절했지만 결국 발간하게 됐다며 후원자들과 관련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책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부담이 많았다며 앞으로 더 똑바로, 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각오를 밝혔다.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책에서 이름이 틀린 분들에게 미안하다며 한글에 서툴러서 그렇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웃음을 유발했다.

최병천 장로와 정래연 작가에게 감사를 전하고 특별히 이덕주 교수께 감사의 마을을 전했다. 감신대에서 공부하면서 분위기 적응이 힘들어 1학년을 마친 후 그만 두려고 했을 때 붙잡아 주신 분이 이덕주 교수라며 그때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자신이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안산제일교회(고훈 목사)에서의 사역에 관해 언급하면서 감사를 전한 후 한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2011년 네팔로 돌아가 사역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은 없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셨다고 신앙고백했다. 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길에서 그 뜻대로 쓰임 받길 원한다는 말로 인사를 마쳤다.

선교국 태동화 총무의 축도로 출판감사예배를 마쳤다. 태 총무는 축도하기 전에 감리교 선교의 효시 아펜젤러의 순직 연도(1902년)에 기감 최초의 해외선교사(홍승하 전도사/ 하와이)를 파송했다는 점과 지금까지 기감은 전 세계에 2,4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현재 81개국에서 1,285명의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이러한 선교 물줄기의 영향을 받은 수먼 감독의 헌신과 사역을 통해 네팔의 선교 역사가 더욱 확장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로 축복했다.

축사를 전한 후 축도하는 태동화 총무
축사를 전한 후 축도하는 태동화 총무

 

수먼 고우덤이 걸어온 삶의 길 … 책 내용 요약

태어나자마자 미래의 꿈을 꾸는 것에 한계가 정해져 있다면 어떨까? 누구나 노력하면 기회를 얻어 대통령이 되고 대학교수나 기업가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대한민국과 달리 남아시아의 네팔은 계급에 따라 정해진 한계가 있다. 이는 힌두교의 영향으로 생긴 카스트라는 계급제도 때문이다. 네팔은 1963년에 카스트제도 폐지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관습과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의 성과 외모만 보고도 어느 카스트인지 알 수 있기에 쉽게 관습을 뿌리 뽑는 것이 어렵다.

카스트는 브라만, 체트리, 바이샤, 수트라 네 개의 등급으로 나눠져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다양하다. 예전에는 카스트제도로 직업까지 정해졌을 정도다. 성직자나 학자 등 정신적 측면이 강조되는 직업은 브라만의 몫이고 상업이나 공업에 해당하는 직업은 낮은 카스트의 몫이었다. 또 카스트제도에 속하지 못한 ‘불가촉천민’(달리트)이 있다. 이들의 인구 비율은 약 20%로 알려져 있다. 보통 시골 변방에 격리되어 거주한다.

수먼은 브라만 계급에서 태어났지만 시골의 가난한 집안이었다. 가족과 이웃, 동네 모두가 가난했다. 그래서 돈을 벌기로 했고 해외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받는다는 말에 사우디아라비아와 말레이시아, 한국 사이에서 고민했다. 모두 모르는 나라지만 돈을 많이 준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생각이 거듭 바뀌었다. 결국 한국으로 결정한 그가 브로커를 통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날이 1991년 10월 18일, 그의 나이 20세였다. 그때부터 한국에서 가구공장 노동자의 삶이 시작됐고 개신교로 개종하는 ‘중생체험’도 했다. 취업비자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공장주의 배신으로 불법체류자가 되어 신분을 회복하는데 많은 돈을 써야 했고 다시 유리공장으로 옮겨 일했다.

그 시기에 신학교 공부를 결심하고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시작했으나 지치고 힘들어 자살까지 생각했다. 고단함으로 지친 삶에 평안을 주고픈 마음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둘 생각까지 하던 찰나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마음을 바꾸자 곧 천사가 나타났다. 거주지 문제로 고민하던 자신에게 교회의 전도사로부터 집에 들어와 함께 살아도 된다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축복도 누렸다. 그가 바로 지금의 아내인 박옥례 사모다.

조국을 떠나 한국으로 온지 7년 만인 1998년, 네팔로 잠시 돌아갔다. 힌두교를 포기하고 개신교인이 된 그를 반길리 없는 가족들의 핍박을 꿋꿋이 이겨내며 견디던 그에게 가장 먼저 힘이 되어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어느날 성경을 달라고 하여 두 달 동안 읽은 아버지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자신에게 “네가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렵겠지만 계속 가라. 나는 뭐라고 하지 않겠다.”라며 주변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방패가 되어 주었고 하나님을 믿겠다는 고백까지 했다.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아버지였지만 곧 하나님 곁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있을 수 없었다. 개신교인이 된 그를 친척들이 내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눈물로 떠나보낸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쫓겨난 그는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픈 마음에서 비자를 기다리던 그에게 소식이 온 것은 2003년 2월, 한국에 다시 돌아온 그는 세신교회 김종수 목사를 찾았다. 김종수 목사가 세신교회 교우들과 네팔에서 단기선교를 할 때 통역하며 인연을 맺었다. 김종수 목사는 그가 감신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자금과 숙소를 후원했다. 그렇게 감신대에서의 신학생 생활이 시작됐고 그때 만난 인생의 은인, 은사가 한국교회사를 가르치던 이덕주 교수다. 세신교회 교육관에서 함께 지내며 감신대에서 공부하던 김호운 전도사(중국인 유학생)의 소개로 만난 이덕주 교수는 그에게 인생의 멘토요 스승이었다. 이덕주 교수의 주선으로 당시 네팔,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몽골, 베트남, 일본, 브라질, 중국, 카자흐스탄 등에서 유학 온 10여 명의 외국인 유학생들이 모임을 결성했다. ‘겨자씨기도회’(눅 17:5~6)라고 이름 붙이고 매주 수요일마다 이덕주 교수의 연구실에 모여 예배했다. 그때 이덕주 교수의 메시지는 그와 유학생들에게 한 주간을 살아내는 영양분이 됐다.

2006년 4학년 때부터 선교사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부 졸업 후 곧바로 신학대학원에 입학해 2009년 2월 졸업했다. 이어 한 달 후 조국 네팔로 돌아갔다. 네팔에서 사역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으로 올 때는 혼자였지만 두 번째 조국으로 돌아갈 때는 아내 박옥례 사모와 딸 소피아가 함께했다. 그러나 네팔에서의 사역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깨닫고 6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안산제일교회(고훈 목사/허요한 목사)에서 주말에만 네팔예배 담당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그리고 평일에는 화재보험회사에 취직해 개인상해보험에 가입한 네팔 사람의 통역 역할을 했다. 그렇게 ‘이중 생활’을 1년 동안 어어갔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보험회사를 사직하고 부인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길 기다렸다.

1학기 과정만 마친 상태로 중단했던 선교사 훈련이 2011년 스리랑카에서 재개된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해외훈련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대한수도원 박명희 원장의 후원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끄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덕주 교수의 소개로 미국 웨슬리신학대학원 신경림 부총장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박사과정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 미국과 한국, 중국의 캠퍼스를 돌며 코스웍을 마치고 미국에서 졸업했다.

그리고 2011년 4월 계속 기도하던대로 조국 네팔을 향해 떠났다. 네팔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먼저 네팔에 입국해 신학교 사역을 하고 있던 박대인 선교사의 제안에 따라 신학교 사역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교회도 개척했다. 그해 목사고시에서 성경과목을 패스하지 못해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고 그에 따라 선교사로 파송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후원교회가 없어 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돕는 천사의 손길을 통해 그와 가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

2012년 목사고시에 합격해 2013년 4월 베다니교회에서 개최된 서울남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되어 선교사로 파송받은 이후 교회 사역에도 힘이 붙어 성도 수는 늘었고 예배처소로 사용한 집이 작아 넓은 장소를 임대했다. 드러내고 전도하는 것이 금지된 나라에서 불가능한 일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셨다. 그때 이덕주 교수가 네팔을 방문해 교회에서 설교하고 신학교도 둘러보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힌두교가 깊은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로 힘들다. 눈에 보이는 것을 신으로 섬기는 네팔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신이라고 전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네팔에서의 전도는 더욱 어렵다. 오직 믿음의 눈과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

네팔감리교회는 2011년 공식출범을 하면서 임근화 선교사가 초대 감독을 맡아 8년 동안 수고한 후 2019년 10월 제2대 감독으로 수먼 고우덤이 피선됐다. 그 이전부터 네팔선교에 큰 힘이 되어주던 꽃재교회 김성복 목사가 방문해 축하하고 목회자 세미나도 열었다. 꽃재교회는 네팔신학교 운영을 위해서도 큰 후원자가 되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위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딸 소피아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2024년 감신대에 입학해 공부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2011년 남아공에서 열린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에서 세계감리교협의회(WMC) 회원국이 된 네팔감리교회는 현재 10개 지방 417개 교회 규모로 성장했다. 올해 2월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감리교협의회(AMC)에서 회원국으로 승인받았다. 2011년 수도 카트만두에 설립한 네팔 감리교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BBS 과정(2년), 목회자 자녀 장학금 사업, 청년 사업, 재난구호 사업을 이끌고 있다.

수먼 감독은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기적 같은 하루를 맞으면서 마음 속에 그린다. 네팔의 태양이 솟아오르듯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된 네팔을.

 

격려사를 전하면서 부부에게 손을 잡으라는 이덕주 교수의 '호통'에 손을 잡고 겸연쩍어 하는 수먼 감독과 박옥례 사모
격려사를 전하면서 부부에게 손을 잡으라는 이덕주 교수의 ‘호통’에 손을 잡고 겸연쩍어 하는 수먼 감독과 박옥례 사모
출판감사예배가 열린 감신대 웨슬리세미나실 입구에서 축하객을 맞이하는 수먼 감독과 가족들(수먼 감독 뒤에 보이는 이가 딸 소피아, 그 위 흰색 상의 입을 이가 박옥례 사모)
출판감사예배가 열린 감신대 웨슬리세미나실 입구에서 축하객을 맞이하는 수먼 감독과 가족들(수먼 감독 뒤에 보이는 이가 딸 소피아, 그 위 흰색 상의 입을 이가 박옥례 사모)
예배 사회 전완 목사
예배 사회 전완 목사
예배 기도 원영만 목사
예배 기도 원영만 목사
특송하는 꽃재교회 선교부
특송하는 꽃재교회 선교부
기도하는 참석자들
기도하는 참석자들
김종수 목사의 설교를 경청하는 참석자들
김종수 목사의 설교를 경청하는 참석자들
축도하기 전에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는 태동화 총무
축도하기 전에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는 태동화 총무
포스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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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겨자씨’ 수먼 고우덤 목사 신앙 이야기…”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

네팔의 겨자씨’ 수먼 고우덤 목사 신앙 이야기…”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

  • 2024-10-10 19:07

수먼 고우덤 목사의 책 '수먼 고우덤' 출판 축하예배가 지난 7일 서울 서대문구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열렸다. 수먼 고우덤 목사의 스승인 이덕주 교수(왼쪽)가 수먼 고우덤 목사 부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다. 정선택 영상기자

수먼 고우덤 목사의 책 ‘수먼 고우덤’ 출판 축하예배가 지난 7일 서울 서대문구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열렸다. 수먼 고우덤 목사의 스승인 이덕주 교수(왼쪽)가 수먼 고우덤 목사 부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다. 정선택 영상기자

[앵커]

네팔 흰두교 브라만 출신 외국인 노동자에서 네팔 감리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먼 고우덤 목사의 신앙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에 와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수먼 고우덤 목사를 만났습니다.

송주열 기자의 보돕니다.

 

[기자]

네팔 힌두교 신자로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 출신의 수먼 고우덤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지난 1991년 스무살에 한국에 와 외국인노동자로 고달픈 삶을 시작합니다.

임금 체불에 시달려야 했고, 고된 삶에 지쳐 자살까지 시도했습니다.

그런 수먼 고우덤 목사를 일으켜 세운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계속됐습니다.

다니던 공장에서 취업비자를 만들어주지 않아 불법체류자로 몰리기도 했고, 1998년 비자 만기로 고향에 돌아갔을 때는 개종했다는 이유로 배척과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회유에도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수먼 고우덤은 많은 이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2003년 감신대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10년 만인 2013년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인터뷰] 수먼 고우덤 목사 / 네팔 세계선교교회
“한국에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데요. 여러분 헌신 덕분에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됐고요. 자기의 삶을 뒤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구요. 앞으로 더 잘 살 수 있는 주님 앞에 헌신할 수 있는 저와 독자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가 목회를 시작했는데 순탄치 않았습니다.

2015년 네팔 대지진과 2020년 코로나 펜데믹은 목회자로서 커다란 시험대였습니다.

결국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수먼 고우덤 목사는 지난 2011년 교회 개척 이후 지교회 9곳을 개척했고, 2019년 네팔 감리교의 2대 감독으로 선출 돼 10개 지방 417개 교회의 성장을 돕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수먼 고우덤 목사는 자신의 신앙스토리를 담은 책을 출간하고 네팔에서 핍박을 받으며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사명의 길을 계속 걷겠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수먼 고우덤 목사 / 네팔 세계선교교회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어떻게 한국까지 오게 하고 어떻게 신학공부를 하게 하셨고 어떻게 저를 사용하고 계시는 지 저를 어떻게 네팔을 위해 쓰고 계시는 지 그 내용들을 정리했구요. 모든 내용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하나님 위해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책 ‘수먼 고우덤’ 출판 감사예배에는 지난 20년동안 네팔의 겨자씨로 성장한 수먼 고우덤을 도운 교회와 신학교 동기 등 3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예수를 닮겠다는 열정 하나로 모진 역경을 이겨 낸 제자의 모습이 감격스럽다”며, “한국교회가 지난 20년동안 고우덤 목사란 겨자씨를 심고 나무로 키웠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덕주 교수 / 감리교신학대
“거기 수없이 많은 네팔의 감리교인들, 이제는 수먼 감독님이 그들을 겨자씨로 만들어가는 사역이 감독님의 사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이뤄진 겨자씨의 기적이 네팔 땅에서도 이뤄질 수 있도록 그런 꿈을 우리에게 주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네팔 선교의 겨자씨가 된 수먼 고우덤의 신앙이야기가 신앙과 동역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CBS뉴스 송주열입니다.

영상기자 정선택
영상편집 김성령

https://christian.nocutnews.co.kr/news/6225492

예수기도 북토크 100분 풀영상! 박경조 주교, 김기석• 이민재 •김효경 목사가 함께 하는….

“예수기도” 북토크 100분 풀영상! 박경조 주교. 김기석. 이민재. 김효경 목사가 함께하는… – 당당뉴스 (dangdangnews.com)

 

“예수기도” 저자 이민재 목사와 함께하는 “예수기도” 이야기 북콘서트가 2024년 9월26일 오후6시-8:30 공덕감리교회 공감홀에서 신앙과지성사 주최로 열렸다.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네팔 복음화 위한 20년 외길… 한국교회 은혜로 가능했죠” [출처] – 국민일보

“네팔 복음화 위한 20년 외길… 한국교회 은혜로 가능했죠”

입력:2024-10-09 03:04

브라만 출신 외국인 노동자에서
네팔 감리교 감독된 수먼 고우덤 목사

수먼 고우덤 목사 부부가 7일 서울 서대문구 감리교신학대에서 열린 자서전 출간 예배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네팔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 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네팔 감리교 감독이 됐다. 주인공은 수먼 고우덤(52) 목사로 1991년 스무 살 나이로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급여 연체를 일삼는 일부 악덕 업체 탓에 일자리를 옮기던 중 기독교를 접했다. 이후 네팔 복음화를 위해 한 신학대에 등록해 주경야독하다가 비자 문제로 98년 고국으로 돌아갔다. 현지에서도 한국인 선교사를 도와 영성원을 짓던 그는 영성원 건축을 후원한 세신감리교회의 인연으로 2003년 감신대 장학생이 돼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외국인 노동자 시절부터 교제하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신학 공부도 원 없이 하는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어려움도 적잖아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벅찼다. 고우덤 목사는 “이덕주 감신대 은퇴교수가 손잡아 준 덕에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이 교수는 캄보디아 몽골 베트남 일본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온 유학생 10여명이 속한 ‘겨자씨’란 기도 모임을 지도하며 이들의 학교생활을 도왔다.

 

그는 이렇게 감신대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거쳐 미국 웨슬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2011년 네팔에 세계선교교회를 개척한 이후 지교회 9곳을 세웠고 2019년 네팔 감리교 감독으로 선출됐다. 네팔 감리교신학교 총장이기도 한 그는 현재 신학 교육과 재난 구호 및 목회자 자녀 장학금 지원 등에 힘쓰고 있다.

 

고우덤 목사는 7일 “각종 직함보다 ‘예수의 좋은 제자’로 기억되고 싶다”며 “내 욕심은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드러내고자 앞으로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그의 인생 역정과 네팔 사역이 담긴 ‘수먼 고우덤’(신앙과지성사)도 펴냈다.

 

글·사진=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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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28380657

할아버지 꿈꾸던 광복 이룬 코리아 자랑스러워

“할아버지 꿈꾸던 광복 이룬 코리아 자랑스러워”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 한국 찾아 건국포장 대리 수훈

 

 

 

 

 

우리암 선교사의 4대손 그라프톤 윌리엄스(왼쪽)씨와 3대손 알프레드 윌리엄스(가운데)씨, 델리 윌리엄스(오른쪽)씨를 14일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만났다.

 

아들 이름을 광복이라고 지을만큼 대한민국의 해방을 꿈꾼 미국인 선교사의 업적이 조명됐다.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한 미국인 우리암(Franklin E. C. Williams, 1883~1962) 선교사와 아들 우광복 선생(George Z. Williams, 1907~1994)의 후손들이 한국을 찾았다.

사단법인한국선교유적연구회(회장 서만철 박사) 산하의 우리암·우광복선교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에 이어 우리암 선교사의 후손들을 한국에 초청했다. 올해는 우리암 선교사에 대한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의 건국포장 수훈을 계기로 방한이 이뤄졌다. 10명의 후손이 대리 수훈을 위해 지난 11일 입국했다. 14일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에서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과 우리암 선교사의 3대손인 델리(Delee Willams)씨와 알프레드(Alfred Willams)씨, 4대손 그라프톤 윌리암스(21·Grafton Addison Willams)씨를 만났다.

우리암 선교사는 충남 공주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1909년 영명학교를 세우고 독립유공자 유관순 열사를 키워낸 인물이다. 1906년 공주로 온 이후 1940년 강제 추방될 때까지 34년간 공주를 비롯한 충남 지역에서 교육과 선교를 전개했다.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을 지낸 조병욱 지사와 유관순 열사의 오빠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우석 지사 등이 영명학교 출신이다.

우리암 선교사는 한국이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첫아들 조지의 이름을 우광복으로 짓기도 했다. 우광복 선생은 14살에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의 광복 소식을 듣고 돌아와 군의관으로 자원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공헌을 했다. 서 회장은 “미 군정에서 일할 50명의 한국인을 선발할 때 우광복 선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선발된 50명 가운데 35명이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암 선교사의 3대손 델리씨는 자신이 기억하는 할아버지 우광복 선생의 모습을 회상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14살까지 살았던 우광복 할아버지는 본인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컸다”며 “제가 어렸을 때까지도 한국과 미국의 경제 격차가 매우 컸다. 할아버지는 당시 한국의 상황과 관계없이 한국인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열정적인지를 알려주셨다”고 소개했다.

우광복(사진 오른쪽) 선생과 손자들. 사진 가장 왼쪽이 델리 윌리엄스씨, 우광복 선생 바로 앞이 알프레드 윌리엄스씨다. 델리 윌리엄스씨 제공

 

델리씨의 동생 알프레드씨는 “한국에 오자마자 할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하셨는지 단번에 이해했다”며 “할어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에 대해 알리기 위해 무척 노력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윌리엄스라는 이름이 미국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인데 지난해에 이어 이렇게 한국에 오면서 우리 가족들이 윌리엄스라는 이름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며 “우리 조상의 업적을 발견하는 일에 한국교회가 나서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우리암 선교사의 4대손 그라프톤씨는 “지난해 한국에 오기 전까지 선조들이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룬 분들인지 몰랐다”며 “한국이 광복을 이룬 뒤 이렇게 발전하고 교회가 많이 세워져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됐다는 점에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라프톤씨는 “더 늦기 전에 선조들의 업적을 배우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며 “할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해서 자녀들에게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엘프레드씨는 “공주에 우리암 우광복 기념 박물관 건립이 논의되고 있다고 들었다”며 “예산이 많이 들 텐데 우리 가족도 그 일에 어떤 모양으로든 이바지하며 선조들의 한국 사랑을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지난해 우리암 선교사 후손 한국 초청 행사에서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 알프레드 윌리엄스씨 제공

 

한편 15일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암 선교사 후손들에게 직접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윤 대통령은 “1908년 입국한 미국인 선교사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선생은 충남 공주에 영명학교를 설립한 후 30여 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며 “1943년 인도 전선에서 광복군의 한·영 연합 작전을 도왔고 광복 직후엔 미 군정청의 농업 정책 고문으로 발탁돼 활동했다”고 업적을 소개했다.

서만철 회장과 임연철 전 국립극장장이 지난해 펴낸 책 ‘우리암과 우광복 이야기'(밀알북스)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8567297

“6·25전쟁, 한국만 아닌 자유주의 승리 위한 싸움”… 그의 사기 고취로 참패 피했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비망록 ‘한국전쟁’
미군 시선으로 본 한국전쟁, 56년 만에 번역
여성 종군기자 히긴스, 선교사 포로 젤러스 등
한국전쟁 다룬 책 잇따라 출간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무엇보다 전투의지 회복과 자긍심 고취가 시급하다고 봤다.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가 전방지휘소를 방문해 야전 지휘관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리지웨이는 이후 유엔군사령관까지 오른다. 플래닛미디어 제공

 

 

“마침내 대규모 포성과 함께 한반도에 전면전 발발 신호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우리가 탄생시킨 약소국 대한민국은 자신들이 저항 시늉만 할 뿐 싸울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도 상호 지원한다는 과거 합의를 이행할 수 있는 군사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6·25전쟁을 이끈 매슈 리지웨이(1895~1993) 유엔군사령관은 자서전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 영웅 맥아더,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에 견줘 명성이 특출나지는 않다. 그러나 3년간의 한국전쟁 중 2년가량 군을 이끌면서 한반도 적화통일을 저지하고 휴전선 위치까지 전선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지휘관이 그다. 리지웨이가 1967년 출간한 한국전쟁 징비록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이 출간 56년 만에 뒤늦게 번역됐다. 전쟁터를 누빈 여성 종군기자,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던 미국인 선교사가 쓴 한국전쟁 책도 전쟁 발발 73년, 정전 70년을 기념해 출간됐다.

 

매슈 B 리지웨이 지음ㆍ박권영 옮김ㆍ플래닛미디어 출판·355쪽ㆍ2만5,000원

리지웨이가 1950년 12월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할 당시 상황은 최악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유엔군은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한동안 북진을 이어갔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며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뺏기고 남하했다. 국군·유엔군에서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힘들다는 패색이 짙었다. 미군·유엔군에서는 “왜 우리가 낯선 땅에서 싸우다 죽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리지웨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사기를 고취하는 것이었다. 1951년 1월 21일 전 장병에게 지휘 서신을 내려보낸다. “이것은 동맹국 한국의 자유와 국가 생존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다. 어떤 군 사령부도 우리보다 더 큰 도전을 하거나 우리 자신과 국민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을 때 리지웨이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펴낸 플래닛미디어 이보라 편집장은 “한국전쟁은 우리의 전쟁인데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과오는 온데간데없고 이념만 남아 있다”며 “미국 입장의 책이지만 우리가 전쟁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또 승리를 이끌어내기까지 어떤 감동적 과정이 있는지 읽을 수 있는 역작”이라고 했다.

 

미국 뉴욕 헤럴드트리뷴 소속 기자였던 마거릿 히긴스가 한국전쟁을 취재하고 쓴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의 표지들. 히긴스는 이 책으로 여성으로선 최초로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에서 수상했다. 오른쪽은 히긴스가 맥아더 장군과 대화하는 모습. 아마존 캡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1920~1966)가 지은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은 전쟁의 긴박함과 참상을 생생하게 전한 책이다. 뉴욕 헤럴드트리뷴 도쿄지국장이던 히긴스는 전쟁이 나자 이틀 만인 6월 27일 서울로 날아왔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한강 인도교 폭파·낙동강전투·인천상륙작전·서울수복 현장을 직접 목격한다. 서울수복 이후 명동성당을 찾은 후엔 이렇게 썼다. “성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십자가는 제단에서 떼어졌으며 대신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이 우리를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공산당 본부로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히긴스는 “미국은 이 전투를 사전 준비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고 미국을 비판했다.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본국이 전쟁의 참상을 알아야 병력과 물자를 원활히 공급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을 향한 히긴스의 평가는 이렇다. “전쟁 중 한반도에서 많은 비극이 발생했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것이 자유세계를 위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우리는 지금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종의 국제적인 자명종 시계 역할을 한 것이다.”

 

임연철 번역ㆍ밀알북스 발행ㆍ372쪽ㆍ2만5,000원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포로를 그린 그림. 상하이 사립 미술관인 룽(龍)미술관에 전시됐다. 연합뉴스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래리 젤러스(1922~2007)가 쓴 ‘적의 손아귀에서’는 전쟁이라는 혼돈에 빠진 민간인의 고통과 절망을 알려주는 저술이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당일 북한군 포로가 돼 3년 전쟁기간 내내 인권을 유린당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 공군 무전병으로 참전한 경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국군·유엔군의 북진으로 한겨울에 북한 만포와 중강진 일대를 도보로 올라가는 ‘죽음의 행군’을 시작한다.

추위, 굶주림, 북한의 즉결 처분으로 미군 포로 700명 중 500여 명, 민간인 포로 75명 중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젤러스와 함께 살아남은 민간인 포로 50여 명은 모스크바를 통해 귀국했고, 미군 포로는 겨우 250여 명만 생존해 휴전협정 후 석방된다. 번역자는 후기에 이렇게 썼다. “조명되지 못하고 묻혀 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잊혀 가는 내한 선교사의 숭고한 업적을 한 분이라도 더 발굴해야 한다.”

정지용 기자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62509250000122

정전 70주년… 한국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정전 70주년… 한국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의 6·25 회고록
당시 北포로였던 미국 선교사 수기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 박권영 옮김 | 플래닛미디어 | 356쪽 | 2만5000원

 

 

적의 손아귀에서
래리 젤러스 저 | 임연철 편역 | 밀알북스 | 372쪽 | 2만5000원

“한국군에는 북한군처럼 중국에서 전투 경험을 쌓고 돌아온 인적 자원들이 거의 없었으며, 현대 전투 수행 방식에 대해 교육받은 인원들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무엇보다 한국군 내에서는 ‘체면’이 가장 중요했다. 한국군 장교들은 자신들보다 계급이 낮았던 미군 고문관들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별세한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한반도의 6·25전쟁에 참전한 매슈 리지웨이(1895~1993) 장군의 회고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군은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군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을 폄훼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남한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하고 가정에 헌신적이었다. 한국군에게 부족한 것은 싸우려는 의지나 용기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체계적이고 강한 훈련과 훌륭한 리더십이 너무도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6·25 발발 73주년과 정전 70주년을 맞아 미국인의 시선으로 6·25전쟁을 본 회고록 두 권이 출간됐다.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해임 이후 유엔군사령관에 오른 리지웨이 장군의 6·25전쟁 회고록이고, ‘적의 손아귀에서’는 전쟁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된 미국인 선교사의 수기(手記)다.

리지웨이는 건조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우리가 간과해 왔던 전쟁의 중요한 지점을 짚는다. 그가 통탄한 것은 한국군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1951년 1월 1일 아침에 서울 북쪽에서 마주친 미군 장병들은 개인 소총과 공용 화기를 모두 버리고 사색이 된 채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중공군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리지웨이가 보기에 한반도에서 제대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자폭탄과 유엔을 믿은 미국은 심리적으로 안주한 채 성급하게 군사력 단축을 단행했고, 설사 전쟁이 발생해도 쉽게 이기리라 생각했다.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둔 1950년 12월, 더글러스 맥아더(앞줄 오른쪽) 사령관과 함께 전장을 순시하는 매슈 리지웨이(앞줄 가운데) 장군. 리지웨이는 회고록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를 반복적으로 무시한 끝에 해임된 맥아더를 비판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리지웨이의 역할은 패배주의가 만연한 미 8군을 효과적으로 이끄는 일이었다. 예하 부대 지휘소를 방문해 장병들의 태도와 대화 내용, 행동을 통해 그들의 전투 의지를 들여다봤고, 전투의 의의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어떤 경우라도 고립된 부대를 버리지 않고 고국으로 데려간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전투 의지를 고취하고 위력 수색과 공세 작전을 펼친 끝에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38선 이북까지 회복해 한반도의 적화 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리지웨이는 지휘 서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자유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서구 문명의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물리칠 수 있느냐, 아니면 포로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시민들을 노예로 만들며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리지웨이의 말이 거짓말이거나 과장이라 의심된다면 ‘적의 손아귀에서’를 읽어볼 만하다. 개성 송도중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래리 젤러스(1922~2007)는 6·25 발발 당일 북한군의 포로가 돼 평양의 수용소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북한군은 민간인 포로 75명을 미군 포로 700명과 함께 평북 만포로 이동시켰는데, 북진 속도가 빨라지자 만포부터 더 북쪽 길을 한겨울에 걷게 하는 ‘죽음의 행군’이 시작됐다.
대부분 여름에 붙잡혀 얇은 옷밖에 없는 포로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의 한파 속에서 200㎞ 산길을 걷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미군 포로 낙오자 중 인민병원으로 보내준다고 속인 뒤 사살한 인원만 200여 명이었다. 결국 미군 포로 약 500명과 민간인 포로 20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아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통해 귀국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고통을 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는 사라졌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제도를 향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통제하는 제도일 뿐이다.”

유석재 기자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3/06/24/3MLGKAFF2NEGTLE4MSXOQK7WQA/

10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난지도 성자-人間 황광은

10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난지도 성자
人間 황광은
김희보(1권), 황광은(2권) 세트, 영암장로교회 엮음, 신앙과지성사, 2023

 

 

10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난지도 성자

(<인간 황광은>, 김희보, 신앙과지성사, 2023)

1.
난지도의 성자 황광은 목사가 다시 돌아왔다. 2023년 2월 19일, 영암교회는 매우 부산했다. 고 우신 황광은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예배가 열렸기 때문이다. 영암교회 신도들은 100년 만에 다시 오시는 담임목사님을 맞이하기에 분주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 관계자는 물론, 한국보이스카우트 연맹, 서울 YMCA, 삼동소년촌(서울 상암동 소재 황 목사가 개척한 사회복지 시설), 대광중고 동창회 관계 인사들이 점심 식사 이후에 줄을 이었다. 유상진 담임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1부 예배 서두에서 이 교회 연합성가대원(약 100명은 될듯하다)이 헨델의 할렐루야를 부르며 100년 만에 다시 오시는 담임목사님을 맞이했다.

제1부 기념식은 100세가 훌쩍 넘은 한국의 지성 김형석 교수께서 후배 황광은의 100년을 축하하고, 온화한 성품과 밝은 미소의 황 목사를 기억했다. 위의 소개한 단체의 관계자들과 친지들 10여 명이 줄을 이어 황광은을 추모했고 3시간 가까운 집회는 줄을 잇는 황광은의 사랑과 섬김의 이야기로 전혀 동요됨이 없이 진행되었다. 간단히 터져 나온 회중들의 박수와 웃음소리는 황광은을 더욱 그립게 했다.

특별히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와 단원들이 경례하면서 고인에게 봉사대장 훈장을 추서했다. 그의 차녀인 황은숙은 유족인사를 하는 동안 눈물을 계속 흘렸고, 그의 사위인 김정호 목사는 그 광경들을 카메라로 연신 찍어댔다. 그날 내 자랑스러운 친구인 김정호 목사(뉴욕 후러싱교회 담임)는 세 번의 주일 설교를 아침 7시부터 담당하여 이 행사에서는 순서 없이 사진만 열심히 찍어 마누라에게 노후가 편할 건수(?)를 하나 만들었다.

고맙게도 영암교회는 이 자리에서 이 책들의 출판을 담당한 신앙과지성사의 공로를 치하하는 감사의 꽃다발을 대표인 나에게 전해주었다. 다과회까지 마치니 저녁 7시가 훌쩍 넘었다. 53년 전에 돌아가신 담임목사를 이렇게 극진히 추모하다니, 이 행사는 한국교회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훈훈한 미담을 제공한 행사였다.

2.
이렇게 한국교회에 귀감이 되는 행사와 출판작업에 기여한 주역은 압구정동에서 오랫동안 ‘사랑의치과’를 운영하는 장지우 장로다. 장 장로님은 1년이 넘도록 원고를 넘긴다고 여러 번 전화했지만 노구를 이끄시고 쉽지 않은 일이려니 하고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어휴, 80을 바라보시는 연세에 원고를 마련하시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겠나 싶어 2022년 추석을 앞둔 상쾌한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덕수궁 옆 ‘달개비’에서 반갑게 장 장로님을 만났다. 젊은이들도 쉽지 않은 원고 작업을 오래도록 하셨으니 그에 대한 치하의 뜻으로 좋은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멀리 있는 김정호 목사의 장인의 원고이니 친구를 대신해서라도 대접하고픈 생각이 들었는데 장 장로님은 큰 배낭으로 한 짐 되는 원고를 내미는 게 아닌가! 하여, 아니 요즘 USB나 이메일로 원고를 주지 누가 이렇게 한 짐의 원고를 주느냐면서 살피니, 황광은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다 복사하여 수집한 것이었다. 와-, 이걸 어쩐다, 그러나 스승을 생각하시는 열정이 너무 값져서 즐겁게 식사하고 출판사로 모셔서 세월의 흔적이 고고한 원고 설명을 들었다.

장지우 장로는 대광중학교 1학년때 황 목사님을 만났단다. 곧 영암교회 담임으로 가셨는데 그분을 선생님으로 존경했기에 그 교회로 따라갔단다. 영암교회에서 10년 목회하시고 47세 너무 이른 나이에 황 목사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53년이 되도록 장지우 장로는 선생님 같은 담임목사님을 그리며 이 교회를 지켰다. 치과의사가 되어 어려운 이웃도 많이 돌보았고, 황 목사님의 호를 딴 우신장학회도 중추적으로 이끌어 왔는데, 이렇게 황광은 목사님께 영향받고 사는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그의 아들도 레바논으로 부인과 함께 떠나서 치과 진료 봉사를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예수의 사랑으로 짧은 생을 살다 간 황 목사의 정신은 이렇게 대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진정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의 칭송이 아니라 예수 사랑의 길이기에 老 장로인 장지우 장로의 열정에 우렁찬 박수를 보낸다.

3.
그렇게 시작된 이 책의 작업은 6개월이 넘어섰다. 잘 파악도 하기 힘든 악성(?) 원고를 입력부터 교정, 교열까지 다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치과의사로 바쁜 장 장로님이 군밤 봉투를 앞세워 출판사를 출입하는 횟수가 잦아들었다. 그때마다 추가되는 원고를 또 어딘가에서 찾아와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마다 페이지는 바뀌고 난감한 일이 벌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고된 과정을 거쳐 탄생한 책인데 첫권은 김희보 선생이 쓰신 『인간 황광은』을, 2권은 아동문학가요 수필가이며 능력의 부흥사였던 황광은 목사님의 동요, 동화, 수필, 설교를 모아 구성했다. 이 책이 예쁜 케이스에 나란히 담겨 품격이 있는 크리스천 홈을 빚내줄 것이라 믿는다. 짧고 굵게 산 한 성직자의 헌신적인 삶이 오롯이 담긴 책을 또 한 권 출판하여 기쁘다.

4.
현재 뉴욕 훌러싱교회를 맡아 좋은 목회를 하고 있는 김정호 목사는 나의 오랜 친구다. 광현교회 서호석 목사와 만날 때마다 우리 시대 어른이 없다, 의논드리고 고뇌를 털어놓고 상의할 어른들이 다 돌아가셨다고, 쓸쓸한 대화를 여러 번 나누었다. 그래서 서로 협력하여 나온 책이 <사랑하며 춤추라>이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이 어른들을 만나게 해 드리자!” 하고 예수의 삶을 살아낸 대천덕, 장기려, 원경선, 김용기, 조아라, 나애시덕, 황광은, 이현필, 여덟 분 어른들의 이야기를 엮었다. 머리글을 김정호 목사에게 쓰도록 했다. 김 목사는 황광은 목사의 신앙과 삶도 썼지만, 이 책의 서문에서 “어른이 없으니 아이들끼리만 싸우는 사회가 되었다. 곁눈질에 익숙하거나 땅에 떨어진 것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면서 예수와 함께 사랑하며 춤추자”라고 말했다.

황광은 목사(1923-1970)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이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 기쁘고 산파역할을 했다는 자부심에 출판인으로 긍지도 가지게 되어 감사하다. <사랑하며 춤추라>의 전체 발문을 써 준 김기석 목사의 말대로 황광은 목사님은 우리 인생의 표지판이다. 우리 인생을 제대로 견인한 표지판 위에서 신앙의 어른들과 함께, 황광은 목사님과 함께, 사랑의 춤을 추어 보는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랑의 시대 예수와 함께 걸어갈 때 용기를 주는 책이다.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 대표)

큰산 큰 믿음의 사람이 펼치는 봄·여름·가을·겨울

큰산 큰 믿음의 사람이 펼치는 봄·여름·가을·겨울

바위 주대범의 교회음악 산책

주대범 지음/ 신앙과지성사/ 2023

 

1.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들을 불효자라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친구보다 더 먼저 간 사람을 나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출판업을 시작한 지 어느덧 40년이 된다.

많은 책을 냈다. 그런데 갑자기 죽어간 주대범 장로의 유고집 『바위 주대범의 교회음악 산책』은 정말 쓰린 마음 추슬러 가면서 만든 책이다.

주 장로는 성격이 활달하기로 소문났다. 불의를 보면 제일 먼저 분개했고, 친구들의 아픈 현실은 누구보다 슬퍼했다. 나의 경우는 잘한다는 게 겨우 책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이라면, 주 장로는 재주가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국어 선생님 출신이라 글도 잘 썼는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루터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명성이 높았다. 가끔 전화해서 친구의 기를 살려주던 주 장로가 내게 진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2020년 11월로 기억된다.

“야, 최 장로 이번 몰트만 박사의 책은 제목이 너무 좋아”

“그래, 기독교인들에게 팁을 준다고 생각하고 붙였지. 당신은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물으면 이 책 제목처럼 『나는 영생을 믿는다』라고 얘기하면 되잖아?”

“그래서 초판이 보름 만에 다 나갔다고? 좋은 일이다. 그런데, 나는 음악 출판사를 3년 만에 문 닫았는데, 네가 꾸준한 것은 참 신통하다.”

주 장로는 몰트만 박사의 마지막 저서 『나는 영생을 믿는다』란 책이 신앙과지성사에서 나온 것이 반가웠고, 또 좋은 반응을 보인다는 소식을 듣고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런데 2021년 1월 29일, 이 통화를 하고 두 달이나 지났을까 주 장로가 세상을 떠났고, 영생 이야기가 마지막 통화가 되었으니 어찌 나쁜 친구가 아니겠나. 온 동네 근심 걱정 혼자 도맡아 했던 주대범 장로는 코로나가 지배했던 세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 침대 신세를 일주일 밖에 지지 않고 세상을 등졌다. 주 장로는 전화 말미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 장로, 내 책 『교회음악 산책』은 꼭 너희 신앙과지성사에서 내 줘야 해!”

 

2.

친구의 마지막 부탁은 그의 죽음 2주기에 실현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이정배 박사와 그의 처남으로 열심히 낮은 곳에서 목회하는 윤인중 목사와 셋이서 여러차례 만났고, 이 두 사람은 원고정리와 책의 꼴을 만드는데, 열심히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책은 저자 주대범처럼 두툼하고 듬직하게 생겼다. 자그만치 584쪽이다. 자비롭게 웃고 있는 사진을 표지에 썼는데, 친구를 맞이하는 반가운 미소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2023년 1월 29일 그가 섬겼던 후암동의 루터중앙교회에서 이 책 출판기념예배가 있었다. 많은 지인이 찾았고, 추모의 순서도 정갈했다. 나에게 발행인의 인사를 하라고 하여 나는 두서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구 주 장로의 원고를 정리하고 출판 준비를 하면서 나는 상상했습니다. 하루는 광나루 건너 밀밭길을 개나리봇짐 하나 지고 거니는 주대범을, 하루는 이필완과 같이 갔던 지리산 자락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개나리봇짐을 만지작거리는 주 장로를 연상했습니다. 그 개나리봇짐을 풀어보니 오늘 책이 된 원고 뭉치였습니다. 이제 그 짐이 책이 되었으니 빈손으로 아주 편하게 훠이훠이 영생의 길을 가는 주 장로의 모습을 연상합니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영생의 길을 먼저 떠난 주대범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목이 메어서 더 말하지 못하고 서둘러 인사말을 마쳤다. 이필완과 주대범과 나 셋이서 담양을 거쳐 지리산 자락에서 1박 한 적이 있다. 그때 여행목적은 우리밀로 빵집을 시작한 감청후배 노재화 목사가 빵집 마무리를 위한 돈이 없어 의자와 탁자를 시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격려할 겸, 바람 쐘 겸 떠난 것인데, (그때 내가 노 목사에게 후원금을 전달했다) 주 장로는 자기가 후원한 것보다 더 기뻐하면서 기분 좋아라 했는데, 곧 기회를 만들어 울릉도와 독도를 셋이 같이 여행하자고 약속하며 들뜬 마음으로 귀경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 말로 인사말을 마치고 싶었다. “이 책 가지고 꼭 울릉도와 독도를 가서 빨간 줄 쳐놓은 주 장로의 멋진 주장을 큰 소리로 읽어 줄게!”

 

3.

이 책 뒤표지만 봐도 주대범 장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알 수 있다. “휘황찬란한 교회당에 맘몬과 배타와 상스러운 것들만 가득한 채 버려져 있을 우리의 교회를 걱정하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교회음악 산책길을 떠난다. 20년 이상 한국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신사도운동격인 ‘경배와 찬양’, ‘워십’, 감각적인 미국 성가곡만 부르는 경박함, 현세의 축복과 번영을 빌고 있는 구걸가들은 이제 버려야 할 것들이다. 한국교회 안에 복음적이고 성서 정신에 합당한 노래들이 다시 담겨야 한다. 삶 속에서 늘 도전받으며 어려워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현하려는 찬송이 회복되어야 한다. 품격있고 균형 잡힌 교회음악이 꽃피워져야 한다. 위의 주장을 1부 교회음악 산책으로, 2부를 그의 일기로 구성했다.

그의 일기에는 고뇌하는 한 평신도의 삶의 이야기와 생활신앙의 실천, 그리고 나눔의 기쁨으로 요약된다. 군데군데 좋은 말이 자주 눈에 띈다. 그를 덧없이 떠나보낸 지인들의 추모의 장도 눈시울을 적시게 하지만, 책 편집이 완성될 무렵 날아온 이현주 목사님의 권두시는 죽음을 너머 고통을 넘어 떠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을 더욱 애처롭게 뒤돌아보게 한다.

 

그 사람(이현주)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
풀을 노래하고 있었지
두 번째 보았을 때 그 사람
풀처럼 살고 있었어
마지막 보았을 때 그 사람
한 포기 풀이었네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
별을 노래하고 있었지
두 번째 보았을 때 그 사람
별처럼 빛나고 있었어
마지막 보았을 때 그 사람
한 떨기 별이었네

처음 보았을 때 그 사람
길을 노래하고 있었지
두 번째 보았을 때 그 사람
길 따라 걷고 있었어
마지막 보았을 때 그 사람
외줄기 길이었네

– 고 주대범 장로 2주기에

한국근대화의 산파, 선교사 3천 명의 기록

한국근대화의 산파, 선교사 3천 명의 기록

『내한선교사사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발행, 신앙과지성사 제작, 2022

 

1.

혈기만 왕성했던 나의 감청 시절, 지금의 광화문빌딩은 감리회관과 국제극장을 합하여 지어졌다. 거의 감리회관에서 살다시피 했던 청년들은 감리회관 인근이나 그 건물 지하다방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미국인 선교사 마태진 목사님이다. 마 목사님은 청년들에게 우호적이고 도움도 주었으나 그런 마 목사님을 청년들은 ‘미국 스파이’로 “왜 자기 나라에 가서 놀지 여기 와서 탱자 거려”라는 험한 말을 수시로 했다. 군부독재 시절이라 광화문을 활보하고 다니는 마 목사님 무리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었다. 교회사를 공부한 청년 중에는 마 목사님을 일제 강점기 조선감리교회를 좌지우지했던 웰치 감독이 떠오른다면서, 웰치 감독은 조선의 독립이나 조선감리교회의 자주성에는 관심이 없고, 일본에 아부하면서 “정치는 귀국이, 우리는 오로지 구령사업에만!”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교단을 치리했던 것을 스터디 중에 말하면서 참여했던 청년들과 분노의 공감대를 나눈 기억도 있다. 물론 지금은 미국 고향에서 생사를 오가는 마 목사님께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 역시 나이 들어가면서 나의 출판작업 중에 유독 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책을 많이 내게 되었다. 미국인 선교사들을 혹평했던 내가 선교사들의 평전을 계속 내게 되다니! 물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게 된 이후였지만 옛날의 철없었음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2.

한국교회가 복 받은 교회라는 것을 나이 들며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 땅을 찾아온 선교사들 중 헌신적이면서도 의식 있는 분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대명사가 된 두 분의 삶과 신앙은 지금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근대화는 어찌 되었을까, 한국교회는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제 어느덧 나이가 들었다. 교회에서는 수석장로란다. 자그만 교회를 섬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과 다른 모함을 들을 때면 역정부터 난다. 그런데(일일이 이 두 분 선교사의 업적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우리는 그분들처럼 헌신성이 있는가, 믿음과 사랑이 있는가, 반문해 본다. 선교사들이 제국주의 앞잡이고, 역사의식이 빈곤하여 일제와 독재정권에 부양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보다 큰 의미를 위한 성찰을 통해 정리되어야 할 단편적인 일이다.

 

3.

유독 연희동 칼국수를 좋아하시는 임연철 박사님과 가깝게 되었다. 나는 ‘사애리시 선교사’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임 박사님이 이덕주 교수의 소개로 원고를 들고 왔다. 고향이 논산인 그는 사애리시 선교사에게 전도된 할머니가 자신의 서울 자취방 시절에 밥상머리에서 된장찌개와 함께 꼭 등장하는 인물이 사부인(사애리시) 이야기였다고 했다. 사부인이 아니면 구원 못 받았다는 할머니의 그 오래 묵은 이야기를 책으로 내기 위해서 그는 미국 드루대학교 아카이브를 찾았고 고귀한 자료들을 찾아내었다. 그의 신문기자적 발상과 발품으로 사애리시는 다시 부각되었다. 그가 쓴 『이야기 사애리시』는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뽑혔고, 그가 유관순을 거두어 공주 영명학교와 이화학당에 보내 공부시키고, 돌봐주었을 뿐만 아니라 충청권에 여러 학교와 교회를 세워 감리교선교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란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 책을 발판으로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훈장도 수여 받았다. 사부인은 결혼 3년 만에 남편(로버트 샤프 선교사)이 순직하고 홀몸으로 평생을 한국교회와 교인들, 한국 민중들을 섬기다 갔다(사애리시 관련 유품과 훈장은 천안 하늘중앙교회에 잘 보존되어 있다.). 사애리시 선교사를 통해서 나는 또 한 번 나의 청년 시절의 고정관념, 선교사는 스파이, 선교사는 제국주의 앞잡이라는 생각을 조용히 거둘 수 있었다.

 

4.

이런 생각이 지배적인 시점에서(2022년 5월경) 평소 존경하는 선배인 윤경로 박사, 이덕주 교수가 급히 만남을 청했다. 이유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내한선교사사전』을 준비 중이고, 연구소 창설 40주년 기념으로 사전을 발간하려는데 그 제작을 신앙과지성사에서 맡아 달라는 것이다. 3,500명의 선교사가 소개될 것이고 큰 책으로 1,600쪽이 넘을 것이라고 하였다. 거절할 수가 없는 선배님들의 부탁을 승낙하고 우리 신앙과지성사는 5월부터 비상이 걸렸다. 80여 명의 필자가 자비량으로 쓴 사전원고가 20여 차례에 걸쳐 들어왔다. 이그! 선교사들을 스파이 운운했던 죄(?)를 톡톡히 걸머쥐었다. 원고량은 200자 원고지 3만 매가 넘었고 이것을 두께 6Cm가 넘지 않도록 편집하고 제작해야 했다. 양장제본의 최대 두께가 6Cm이므로, 용지 선택과 인쇄, 제본에 심혈을 기울였다. 드디어 12월 중순, 멋진 책이 탄생했다. 이름하여 『내한선교사사전』이다. 근래 보기드문 대작이다. 이 사전의 제안자이시고 실질적인 산파 역할을 하신 이만열 박사님(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감격하셔서(12월 22일 선교사들의 묘지 양화진에서 출판기념 예배를 드렸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셨다. 12월 22일, 겨울 날씨였지만 유독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몸이 날아갈 정도였다. 많은 귀빈과 내방객은 예배를 마치고 이 두툼한 책을 가슴에 안고, 빠른 발걸음으로 헤어졌다. 이 책에 한국에 온 3,500명 가까운 외국인 선교사들의 삶이 담겨 있다. 너무 귀중한 삶의 기록들이 하나로 묶여 졌다. 한국교회 새로운 기념비가 세워졌다. 하나님은 이 작은 출판사를 통해서 큰일을 이루게 하셨다. 3천5백 명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후원하고 기도했던 세계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다. 이 책의 발간을 토대로 내한선교사들에 대한 격조 있는 연구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최병천 장로 (신앙과지성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