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한국만 아닌 자유주의 승리 위한 싸움”… 그의 사기 고취로 참패 피했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비망록 ‘한국전쟁’
미군 시선으로 본 한국전쟁, 56년 만에 번역
여성 종군기자 히긴스, 선교사 포로 젤러스 등
한국전쟁 다룬 책 잇따라 출간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무엇보다 전투의지 회복과 자긍심 고취가 시급하다고 봤다.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가 전방지휘소를 방문해 야전 지휘관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리지웨이는 이후 유엔군사령관까지 오른다. 플래닛미디어 제공

 

 

“마침내 대규모 포성과 함께 한반도에 전면전 발발 신호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우리가 탄생시킨 약소국 대한민국은 자신들이 저항 시늉만 할 뿐 싸울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도 상호 지원한다는 과거 합의를 이행할 수 있는 군사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6·25전쟁을 이끈 매슈 리지웨이(1895~1993) 유엔군사령관은 자서전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전쟁 영웅 맥아더,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에 견줘 명성이 특출나지는 않다. 그러나 3년간의 한국전쟁 중 2년가량 군을 이끌면서 한반도 적화통일을 저지하고 휴전선 위치까지 전선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지휘관이 그다. 리지웨이가 1967년 출간한 한국전쟁 징비록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이 출간 56년 만에 뒤늦게 번역됐다. 전쟁터를 누빈 여성 종군기자,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던 미국인 선교사가 쓴 한국전쟁 책도 전쟁 발발 73년, 정전 70년을 기념해 출간됐다.

 

매슈 B 리지웨이 지음ㆍ박권영 옮김ㆍ플래닛미디어 출판·355쪽ㆍ2만5,000원

리지웨이가 1950년 12월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할 당시 상황은 최악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유엔군은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한동안 북진을 이어갔지만 중공군이 참전하며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뺏기고 남하했다. 국군·유엔군에서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힘들다는 패색이 짙었다. 미군·유엔군에서는 “왜 우리가 낯선 땅에서 싸우다 죽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리지웨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일은 사기를 고취하는 것이었다. 1951년 1월 21일 전 장병에게 지휘 서신을 내려보낸다. “이것은 동맹국 한국의 자유와 국가 생존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싸워야 하는 이유다. 어떤 군 사령부도 우리보다 더 큰 도전을 하거나 우리 자신과 국민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미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을 때 리지웨이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펴낸 플래닛미디어 이보라 편집장은 “한국전쟁은 우리의 전쟁인데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과 과오는 온데간데없고 이념만 남아 있다”며 “미국 입장의 책이지만 우리가 전쟁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또 승리를 이끌어내기까지 어떤 감동적 과정이 있는지 읽을 수 있는 역작”이라고 했다.

 

미국 뉴욕 헤럴드트리뷴 소속 기자였던 마거릿 히긴스가 한국전쟁을 취재하고 쓴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의 표지들. 히긴스는 이 책으로 여성으로선 최초로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에서 수상했다. 오른쪽은 히긴스가 맥아더 장군과 대화하는 모습. 아마존 캡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1920~1966)가 지은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은 전쟁의 긴박함과 참상을 생생하게 전한 책이다. 뉴욕 헤럴드트리뷴 도쿄지국장이던 히긴스는 전쟁이 나자 이틀 만인 6월 27일 서울로 날아왔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한강 인도교 폭파·낙동강전투·인천상륙작전·서울수복 현장을 직접 목격한다. 서울수복 이후 명동성당을 찾은 후엔 이렇게 썼다. “성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십자가는 제단에서 떼어졌으며 대신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이 우리를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공산당 본부로 사용된 것이 분명했다.”

히긴스는 “미국은 이 전투를 사전 준비 없이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들은 적을 과소평가한 대가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증언해주고 있다”고 미국을 비판했다.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본국이 전쟁의 참상을 알아야 병력과 물자를 원활히 공급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을 향한 히긴스의 평가는 이렇다. “전쟁 중 한반도에서 많은 비극이 발생했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격퇴했다는 것이 자유세계를 위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우리는 지금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일종의 국제적인 자명종 시계 역할을 한 것이다.”

 

임연철 번역ㆍ밀알북스 발행ㆍ372쪽ㆍ2만5,000원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포로를 그린 그림. 상하이 사립 미술관인 룽(龍)미술관에 전시됐다. 연합뉴스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래리 젤러스(1922~2007)가 쓴 ‘적의 손아귀에서’는 전쟁이라는 혼돈에 빠진 민간인의 고통과 절망을 알려주는 저술이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당일 북한군 포로가 돼 3년 전쟁기간 내내 인권을 유린당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 공군 무전병으로 참전한 경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국군·유엔군의 북진으로 한겨울에 북한 만포와 중강진 일대를 도보로 올라가는 ‘죽음의 행군’을 시작한다.

추위, 굶주림, 북한의 즉결 처분으로 미군 포로 700명 중 500여 명, 민간인 포로 75명 중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젤러스와 함께 살아남은 민간인 포로 50여 명은 모스크바를 통해 귀국했고, 미군 포로는 겨우 250여 명만 생존해 휴전협정 후 석방된다. 번역자는 후기에 이렇게 썼다. “조명되지 못하고 묻혀 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잊혀 가는 내한 선교사의 숭고한 업적을 한 분이라도 더 발굴해야 한다.”

정지용 기자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62509250000122

정전 70주년… 한국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정전 70주년… 한국만이 아닌, 인간 존엄성 지키려는 싸움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의 6·25 회고록
당시 北포로였던 미국 선교사 수기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 박권영 옮김 | 플래닛미디어 | 356쪽 | 2만5000원

 

 

적의 손아귀에서
래리 젤러스 저 | 임연철 편역 | 밀알북스 | 372쪽 | 2만5000원

“한국군에는 북한군처럼 중국에서 전투 경험을 쌓고 돌아온 인적 자원들이 거의 없었으며, 현대 전투 수행 방식에 대해 교육받은 인원들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무엇보다 한국군 내에서는 ‘체면’이 가장 중요했다. 한국군 장교들은 자신들보다 계급이 낮았던 미군 고문관들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별세한 미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 한반도의 6·25전쟁에 참전한 매슈 리지웨이(1895~1993) 장군의 회고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군은 제대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군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을 폄훼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남한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하고 가정에 헌신적이었다. 한국군에게 부족한 것은 싸우려는 의지나 용기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체계적이고 강한 훈련과 훌륭한 리더십이 너무도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6·25 발발 73주년과 정전 70주년을 맞아 미국인의 시선으로 6·25전쟁을 본 회고록 두 권이 출간됐다. ‘리지웨이의 한국전쟁’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해임 이후 유엔군사령관에 오른 리지웨이 장군의 6·25전쟁 회고록이고, ‘적의 손아귀에서’는 전쟁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된 미국인 선교사의 수기(手記)다.

리지웨이는 건조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우리가 간과해 왔던 전쟁의 중요한 지점을 짚는다. 그가 통탄한 것은 한국군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1951년 1월 1일 아침에 서울 북쪽에서 마주친 미군 장병들은 개인 소총과 공용 화기를 모두 버리고 사색이 된 채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중공군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리지웨이가 보기에 한반도에서 제대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원자폭탄과 유엔을 믿은 미국은 심리적으로 안주한 채 성급하게 군사력 단축을 단행했고, 설사 전쟁이 발생해도 쉽게 이기리라 생각했다.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둔 1950년 12월, 더글러스 맥아더(앞줄 오른쪽) 사령관과 함께 전장을 순시하는 매슈 리지웨이(앞줄 가운데) 장군. 리지웨이는 회고록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를 반복적으로 무시한 끝에 해임된 맥아더를 비판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

 

 

리지웨이의 역할은 패배주의가 만연한 미 8군을 효과적으로 이끄는 일이었다. 예하 부대 지휘소를 방문해 장병들의 태도와 대화 내용, 행동을 통해 그들의 전투 의지를 들여다봤고, 전투의 의의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어떤 경우라도 고립된 부대를 버리지 않고 고국으로 데려간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전투 의지를 고취하고 위력 수색과 공세 작전을 펼친 끝에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38선 이북까지 회복해 한반도의 적화 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싸워야 한다는 말인가?” 리지웨이는 지휘 서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자유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유와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서구 문명의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물리칠 수 있느냐, 아니면 포로를 총으로 쏴 죽이고 시민들을 노예로 만들며 인간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리지웨이의 말이 거짓말이거나 과장이라 의심된다면 ‘적의 손아귀에서’를 읽어볼 만하다. 개성 송도중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교사 래리 젤러스(1922~2007)는 6·25 발발 당일 북한군의 포로가 돼 평양의 수용소에서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북한군은 민간인 포로 75명을 미군 포로 700명과 함께 평북 만포로 이동시켰는데, 북진 속도가 빨라지자 만포부터 더 북쪽 길을 한겨울에 걷게 하는 ‘죽음의 행군’이 시작됐다.
대부분 여름에 붙잡혀 얇은 옷밖에 없는 포로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의 한파 속에서 200㎞ 산길을 걷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미군 포로 낙오자 중 인민병원으로 보내준다고 속인 뒤 사살한 인원만 200여 명이었다. 결국 미군 포로 약 500명과 민간인 포로 20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간신히 살아남아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통해 귀국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고통을 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는 사라졌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제도를 향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통제하는 제도일 뿐이다.”

유석재 기자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3/06/24/3MLGKAFF2NEGTLE4MSXOQK7WQ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