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제일 겁없는 동물은 ‘하룻 강아지’라고 한다. 호랑이나 사자를 만나도 떨지 않는다. 태어난 지 고작 하루이니 도대체 뭘 알아야 떨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닌가. 그런데 그보다 더욱 용감한 존재가 있다고 한다. 바로 ‘눈먼 사람’이다. 이번에는 눈에 뵈는 게 없으니 겁날 것이 없단다.
물론 다분히 우스개로 하는 말이지만 그냥 웃고 넘길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진실과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채 자기 공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본 회퍼’ 목사의 옥중서간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것,내가 매맞는 것,내가 죽는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단 한 명의 어리석은 독재자로 인해 온 나라가 파탄이 나고, 전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북미 대륙까지 전쟁에 휩쓸리고, 수백 만 유태인이 도처에서 가축처럼 도살 당하고 있었건만 독일 국민들은 조용하기만 했다. 왜 밖은 그토록 조용했을까.
그 이유는 너무나 단순했다. 그들은 정확한 진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댓가는 참으로 가혹했다. 도시가 초토화하고, 꽃다운 젊은이들이 총알받이가 되고, 무고한 노약자와 아이들이 굶주렸고, 나라는 천문학적 액수의 빚더미에 주저 앉았다.
왜 눈 떠야 할까? 인간 역사엔 항상 진실을 왜곡하고 오도하거나 순진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악용하는 사특한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히 ‘착함’이나 ‘순진함’이 더 이상 아름다운 ‘선’이 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적극적인 악만이 악이 아닌 것이라, 소극적인 무지와 방관도 매우 큰 악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북극의 얼음이 좀 녹든 말든 그게 내 가족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 지지리 못 살면서도 선거철만 되면 여지없이 부자당에 몰표를 주는 사람들, 언론의 자유가 막장 수준으로 뒷걸음쳐도 경제성장률만 따지고 있는 사람들, 북한 주민의 고난을 보면서 인권만 따지고 있는 사람들, 교회 갱신을 위한 비판을 교회 공격으로 매도하는 사람들, 목사도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이니 횡령해도 그냥 두자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 새끼는 끔찍이 위하면서도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는 누가 굶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 과연 누가 이들의 눈을 멀게 했을까.
주객이 바뀌고,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고, 가짜가 진짜를 핍박하고, 짝퉁이 진품을 대신하고, 성직자가 부자인 사회는 슬픈 사회이다. 탐욕이 자연을 파괴하는 세상, 돈이 의를 멸시하는 세상, 권력이 진리를 조롱하는 세상,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약탈하는 세상, 그리고 있는 놈들이 더 무서운 세상 그것은 결코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세상이 아니다. 떡 9개를 한 놈이 다 먹고, 남은 떡 1개를 아홉 사람이 나누어야 하는 사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세상이다.
그럼에도 배부른 지도자는 거짓을 말하고, 눈먼 선지자는 평안을 노래하고, 그리고 무능한 장로와 안일한 집사는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백성의 상처를 위로하지 못 하니 오락과 스포츠와 드라마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무엇이 진정한 정의이고 섬김인지 교회는 보여주지 못 했고, 어떤 설교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팔아 고작 만사형통과 만수무강만 늘어놓고 있다. 그러니 이래도 교회가 쇠하지 않고 교인이 줄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기적이다.
왜 잠만 자는가. 이제 눈을 떠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신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라고 분명히 증거했다.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저 높히 구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 임재한다. 따라서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단지 율법책과 교회당 속에만 가두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중세적 세계관일 뿐이다.
그런데 제 아무리 용맹해도 ‘돈키호테’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먼저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잠만 계속 자면 결국은 누군가에게 속게 되는 법이다.
우리는 만날 예배당 바닥에만 머리를 처박거나 또는 단지 시대의 방관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예수님의 사역지는 제사가 넘치던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오히려 가련한 민초들이 뒹굴던 척박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죽기까지 그 길을 갔다. 그게 진정한 제자도가 아닐까.
이제 눈을 크게 뜨고, 성경을 보고, 하늘을 보고, 세상을 보고, 그리고 역사 속에 장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보고 직접 그 잔치에 참여하여 놀라운 감동을 함께 누리자. 지금 내가 실존하고 있는 이 시대의 주인공은 아브라함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다윗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니고, 또한 담임목사님도 아니다. 내 인생의 주연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왜 눈떠야 할까>는 바로 그 주인공들을 위한 작은 마당이 되어줄 것이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마23:16).”
신성남 /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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