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웹진-휴심정] 홍인식 목사는 왜 자기 연봉을 깎았을까
전남 순천중앙교회 담임 홍인식 목사 |
지난 4월 전남 순천의 모(최초)교회인 순천중앙교회에 한 목사가 취임했다. 그 목사의 일성은 자신의 연봉을 깎자는 것이었다. 자기는 “두 아들이 이미 학업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고 부부만 사니, 좀 적게 받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장로들은 예전 담임목사에 대한 예우를 근거로 새 목사에게 에쿠스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아반떼면 된다고 고집했다. 결국 서로 양보해 그가 운전하는 차는 소나타로 결정됐다. 그리고 그는 부임후 가장 먼저 동사무소를 찾아가 “우리교회가 도와줄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동장은 “제가 교회를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큰교회 목사님이 직접 동장을 찾아와 ‘무엇을 도와주면 좋으냐’고 물은 것은 처음이다”고 감격해했다. 이 목사는 최근 장로들이 새해가 되면 호봉이 오르니 연봉도 올린다며 연봉인상을 알리자 자신보다 부목사들에게 월급을 더 줄것을 권했다. 교회 규정이라며 연봉인상을 주장한 장로들에게 그는 “교회에서 이런 본을 보이지않고 세상이 바뀌길 기대할 수 있겠느냐”며 오히려 장로들을 설득했다, 특히 그는 주로 부유한 신자들과 함께 고급레스토랑을 가던 기존의 담임들과 달리 심방 때 담임목사에게 대접하는 식사는 설렁탕과 자장면등 단품에 1만원 이하로 못박았다. 그 뒤로 예전엔 목사의 심방을 부담스러워하던 가난한 교인들도 “저도 목사님과 식사 한번 하고 싶다”며 줄을 섰다. 지난 8개월간 변화를 이끌어 교인들을 행복하게 한 주역 홍인식(60) 목사를 순천시 매곡동 교회로 찾았다. 홍 목사는 우리나라 유일의 해방신학자 목사다. 해방신학은 1960~70년대 남미에서 성직자들이 군부독재의 억압과 빈부 격차로 고통받는 빈자들과 피압박민들의 입장에서 경제적 불평등 구조와 부정의의 해소를 주장한 신학이다. 이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선 민중신학이 태동해 기독교의 반독재 그런데 8개월이 지난 지금 그는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부드러운 언행과 삶’ 때문에 더 주목받는 목사가 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기존 목사들이 거의 찾지않던, 병들고 가난한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안에서 잠겨지는 목사실 문을 밖에서 누구나 열수 있게 했다. 교인들이 명랑해지고, 출석교인도 800여명에서 900여명으로 늘었다. 교인감소세가 현저한 현개 교계상황에서 이것을 기현상으로 꼽힌다. 행복해진 것은 교인들만이 아니다. 그는 “사회가 교회를 위해 있는 게 아니고, 교회가 사회를 위해 있는 것”이라면서 지역사회에 대한 교회의 봉사와 헌신을 강조한다. 그의 교회에선 요즘 순천지역 작은교회 목사들의 모임과 세미나 등이 자주 열린다. 그가 작은교회 목사들을 위해 이런 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 모임이 있는 날이면 그는 가난한 목사들에게 밥을 사곤한다. 최근엔 한 남자가 찾아와 “교인이 아니지만 아버지의 장례예식을 교회에서 치르고 싶다”고 요청하자 일면식도 없던 이웃의 장례를 치뤄줬다. 홍 목사는 오는 크리스마스때도 아카펠라공연단을 초청해 복음성가가 아닌 클래식과 대중음악 위주의 음악을 들려줄 계획이다. 마을 주민들을 위한 서비스다. 그는 어떻게 이처럼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비움과 봉사의 자세를 갖게 되었을까. 홍 목사는 “젊은시절 나는 성공 지향주의자였다”고 ‘의외의’ 고백을 했다. 그는 고 2 때 어머를 따라 누나 여동생과 함께 남미 파라과이를 이민을 갔다. ‘찢어지게’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그는 중·고교 때 전교1등을 할만큼 공부를 잘했다. 그런데 중학교때 분기에 한번씩 내는 몇천원의 납부금을 내지못해 등교정지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 영등포에 있던 학교 서무과직원이 교실로 찾아와 “내일부터 납부금 낼 때까지 학교에 나오지 마라”고 하자 책가방을 싸서 서울역 부근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는 날에도 통곡을 하며 “반드시 성공해 세상에 복수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비행기 표조차 24개월 할부로 마련해 무일푼으로 간 이역만리에서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옷보따리를 들고 행상을 하며 고학해 명문 국립대학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대학 2학년이던 1982년 서점에서 ‘리베라시옹’(해방)이란 단어가 눈에 띄어 집어든 책이 그의 삶을 바꾸었다.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스 신부가 쓴 해방신학 책을 읽고, 그는 “가난은 나만 성공한다고 해결되는게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데 생각이 이르자 성공지향을 버리고, 아르헨티나연합신학대학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했다.
|
댓글을 남겨주세요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