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모의 귀일신학-이정배
이정배 지음, 『유영모柳永模의 귀일신학歸一神學: 팬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를 읽고
– 팬데믹 이후 시대 우리는 왜 다석을 다시 읽어야 하는가 — 임종수(한국예술종합학교)
- 이 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대단히 저어되는 일입니다. 제가 다석 유영모의 사상을 잘 알지 못하기에 글을 쓸 만한 적임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학대학 시절 김흥호 선생님의 강의 사이로 다석사상의 흔 적을 조금 엿보고, 선생님이 풀이한 제소리』를 일독한 후 『다석강의』를 읽은 정도에 불과함을 먼저 고백합니다.
- 그러한 무지의 부끄러움을 안고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고나서 조금은 그 무지를 면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물론 부끄러움은 여전합니다. 다석사상에 대한 무지의 부끄러움과 책을 읽는 동안 겪은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자의 『유영모柳永模의 귀일신학歸一神學』을 읽고나서야 다석사상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동안 다석사상을 가까이 하지 못했을까 자문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석의 한국어가 제게는 잘 읽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의 한국어는 너무 어려웠습니다.(물론 저는 언어란 단순히 사상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의 사상에 가장 어울리는 언어를 찾기 위해 다석이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을 읽는 동안 다석사상에 대한 오랜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저자가 다석의 난해한 한국어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며 다석사상의 알짬을 신학과 종교의 영역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으로 읽어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석사상이 학문의 대상을 넘어, 사람의 속알(본성)에 대한 자각과 일상 속의 영성을 일깨우는 사상임을 이 책을 통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 그래서 저는 “『다석강의』를 재독하며 학문연구의 대상으로서만 아니라 다석이 붙들고 씨름해야 할 영성의 사람으로 다가왔던 까닭”이라 집필의 뜻을 밝힌 저자의 말에 깊이 공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저자는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빈탕한데 맞혀놀이-다석으로 세상을 읽다』를 통해 다석사상을 종교와 신학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연구해왔기에 이 책 역시 앞 두 책의 연속선상에서 읽힙니다. 하나 이 책은 이전의 책들과 성격이 사뭇 다르기도 합니다. 저자가 『다석강의』를 읽는 내내 “직업적 종교인(신학자)이 아닌 신앙인, 구도자의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성찰하기 위한 갈급한 상태에서” “자신을 위한 글쓰기”를 수행한 성찰록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 그래선지 저는 저자의 『유영모의 귀일신학』이 ‘팬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강의』 다시 읽기’라는 부제를 단 것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고 성찰하기 위해 갈급해야 할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를 팬데믹으로 선언한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책을 읽는 동안, 이러한 시대에 일상인으로서 다석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왜 우리는 다석의 사상을 조명하고 읽어야 하는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경제시스템 속에서 욕망의 극대화를 경험하는 오늘, 인간의 크기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이 작아져버린 시대, 다석사상이 우리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데에 어떤 사상과 실천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 혁명보다 일상의 혁명이 힘들고, 몸에 밴 관행과 습관으로 사람만큼 바뀌기 힘든 존재가 없다는 것을 이즈음 더욱 실감하기 때문입니다.(그런 때문일까요. 기질을 변화시켜(變化氣質) 성인聖人되기를 공부의 목적으로 삼아 사람의 변화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그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고자 한 동양의 성현들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 이처럼 성찰이 갈급한 시대에 『다석강의』를 다시 읽어내고자 한 저자는 다석의 사상을 ‘귀일신학(歸一神學)’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귀일’은 “모든 종교의 외형상, 현상적 차이가 있지만 진리는 하나뿐” 이며 이는 “신중심적 다원주의라는 서구적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그리고 “신이라는 실체를 말하지 않고 전체와 개체의 관계에 역점을” 둔 것이라는 점을 먼저 염두에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오랜 다석사상 연구의 결정(結晶)을 ‘귀일신학’이란 이름으로 오롯하게 담아 놓았습니다.
- 그렇다면 ‘귀일’이란 무슨 뜻일까요. 짧은 지면에 저자의 ‘귀일신학’을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제 힘이 닿지 못하나, 저자가 ‘귀일’의 핵심은 ‘참나’를 찾는 데에 있다고 한 데서 뜻의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저자에 따르면 우주생성의 근원인 ‘하나’는 본디 ‘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래 ‘하나’였기에 그 하나로 돌아가는 바를 일컬어 ‘귀일’이라 합니다. 여기서 “사람 속에 천지가 하나로 되기에(人中天地一) 사람(人)이 중요”한 것은 “본래적 하나가 인간 속에” 있기 때문이며 다석은 이를 인간의 ‘밑둥’, ‘바탈’이라 하고, ‘하느님 아들’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그러고보면 저자가 말한 ‘신학’이 처음부터 이미 서구의 유신론적 신학 개념을 설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귀일신학’으로 다석사상을 독해하며 ‘귀일신학’의 뜻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 이후 시대를 위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일까요?
- 이런 물음 속에 저는 ‘생각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다석의 ‘염재신재’(念在神在), 즉 ‘생각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는 깨침을 전하는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저자는 유학의 신독(愼獨)을 예로 들어 “어떤 시공간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있다는 확신 하에 자기 삶을 성찰하는 이들을 양육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자의 뜻에 기대어 관견을 적으면, 생각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현존을 참으로 믿게 된다면 우리는 사람과 모든 존재를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이 땅에 뿌리박되 매이지 않고 하늘을 바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생각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는 믿음은 ‘본래적 하나’ 즉 우리 안의 속알(영, 빛)을 깨닫는 것과 다르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팬데믹 이후 시대 우리에게 요청되는 삶과 세계관의 변화는 인간이란 ‘본래적 하나’, 속알․영․빛을 품은 귀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그러기에 저자는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역할, 제도로서의 종교를 비판하며 ‘영성으로서의 종교’가 영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있음과 인간의 영(속알, 빛)은 시공간에 매이지 않고 제도에 갇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오늘을 ‘일상의 종교화’가 시급한 실정이라고 역설합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인식이 담긴 본서는 다석사상을 귀일신학으로 해석하는 저자가 종교적, 영적 혼돈의 시대, 영적 삶의 실천이 절실한 코로나 19시대 이후를 사는 기독교인들과 종교인들에게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는 희망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 이제 책 속으로 좀 더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책은 『다석강의』의 차례를 따라 모두 43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다석강의』 전체 43강중 첫 강의와 마지막 강의가 “모두 사생관,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을 새로이 발견하고, “삶과 죽음은 배를 갈아타는 것일 뿐이다”, “알몸이 아니라 얼맘으로 살라”로 되어 있음에 주목합니다. “종교란 결국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니라 얼로 사는 삶, “죽음을 삶 속에서 초월(극복)하고 죽음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다석의 부활사상임을 강조합니다. 어쩌면 첫 강의와 마지막 강의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 그리고 죽음을 삶 속에서 초월하고 죽음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한 데에 다석사상의 전체가 담겨 있지 않은가 합니다.
- 그러나 저자는 좀 더 긴절하게 다석사상의 종교(신학)적 가치를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저자는 다석의 ‘없이 계신 이’를 신에 대한 동양적 이해의 표현으로 봅니다. ‘있음’으로서의 유신론적 표상이 아닌 ‘없이 있는’ 대극의 일치를 다석에게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없이 계신 이’는 ‘있음’과 ‘없음’ 어느 쪽에도 붙들리지 않는 신(神)을 표현한 말입니다.(저는 여기서 ‘신’을 ‘이름’과 ‘있음’에 가둔 종교인들의 폭력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둘째, 다석이 인간의 ‘밑둥(바탈)’으로서의 신이라는 맥락에서 인간 속에서 신적인 것을 찾은 것입니다. 다석은 ‘얼’의 차원에서 붓다와 예수 모두 본질상 같다는 주장을 합니다. “자신의 내면의 빛으로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다석의 지론인데, 저자에 따르면 이를 통해 다석은 대상적 믿음, 곧 대속론(代贖論)에 의존한 정통기독교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저자가 언급한, 대속이 아닌 자속自贖의 맥락에서 ‘동양적 기독교’의 뜻을 사유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셋째, 현실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의 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합니다. 그런 중에도 저자에 따르면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존재들’인 이 땅의 성인들이 있습니다. ‘몸 줄여 마음 늘리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저자가 말한바, ‘길을 가다 길이 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다석이 바로 “그 길을 예수의 방식대로 가고자 했을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예수가 ‘제 뜻을 버려 하늘 뜻’을 구했기에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길임을 저자는 일깨우고 있습니다.
- 이처럼 우리에게 삶의 전환을 요구하는 다석사상은 오늘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물론 다석사상이 가진 의미를 이 시대에 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석 사상이 오늘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를 네 가지로 꼽습니다. 첫째, 다석사상에 담긴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각성입니다. 다석사상의 핵심은 “인간을 성인, 군자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선한 존재로” 보는 데에 있습니다. 본래 모두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늘이 부여한 본성(바탈)을 지닌’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석사상에는 인간존재의 생태학적 각성을 통한 생태적 자아의 각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다석이 얼만을 중시하지 않고 몸도 중시하며 일식(一食)과 단색(斷色)을 통해 탐진치(貪瞋癡)를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다석사상에는 ‘행한 것만큼만 아는(믿은) 것이다-지행합일의 삶’, ‘밖의 불을 끄고 자신의 빛을 따라 살라’는 실천수행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저자의 비판대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사는 종교인일수록” 제소리 없이 남의 말만 하며 살기에 몸과 마음이 따로 놉니다. 자신이 읽는 종교의 경전들이 제소리가 되는 과정을 겪지 않은 결과입니다. 넷째, 다석사상에는 문명비판적(생태적) 시각이 숨 쉬고 있습니다. 다석에 따르면 우리 몸은 탐진치의 훈습으로 길들여져 있습니다. 이에 맞서 다석은 일식을 행하며 ‘제 좀 줄여 마음 키우는’ 삶으로 ‘세상을 구하는 십자가’의 뜻을 살아내고자 했습니다. 다석의 이러한 실천수행을 거듭 보여준 저자는 앞으로 인류의 미래는 ‘단순한 삶의 양식’에서 비롯될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면서, 다석의 삶과 사상에 대한 재해석이 문명사적인 맥락에서 새롭게 재의미화되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 앞에서도 비쳤듯 저자는 ‘귀일신학’으로 인식한 다석사상을 학문의 언어로 가두지 않고 누구나 음미할 수 있도록 다석사상의 핵심을 자상하게 풀어놓았습니다. 특히 본서에는 다석사상의 고갱이를 모은 다석강의를 두고 저자가 오래도록 묵히고 삭인 사색을 담고 있습니다. 거짓 글은 사람을 잠시 속일 수 있지만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오래지 않아 거짓임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러나 참 글은 시간을 견디며 더욱 우리의 삶과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마음이 담긴 구도와 사색의 깊이를 경험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서가 다석사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영적 자양이 되어 우리 안의 ‘속알’(빛)이 밝혀지길 간절히 바라며 이 땅에서 ‘영원’을 경험하고 지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길 기도합니다.
- 마지막으로, 책속에는 곱씹어 음미할 구절이 너무도 많은데, 그중 오늘의 한국 현실을 생각하니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 대목이 떠오릅니다. 사람에 대한 경외와 존중이 사라지고 존엄성이 훼손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사람들한테서 하느님의 형상과 서로의 속알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사람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도구처럼 함부로 대하는 오늘, 다석의 ‘존신우애윤리유’(尊信友愛倫理由)를 풀어놓은 저자의 다음 말은 깊이 새겨 삶속에 육화해야 할 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우애, 형제 사랑이다. 우애는 하느님을 만난 경지이다. 살(色)끼리 만나지 않고 정신과 말씀이 하나 상태로 만난 까닭이다. 사람은 육체로 보아 짐승이지만 그 안에 하느님 씨(속알)가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몸도 중요한 것이다. 다석이 ‘몸성히’를 강조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인간 속의 높은 곳, 그곳을 다석은 ‘존’(尊)이라 불렀다. 그렇기에 인간은 인격을 지녀야 옳다. 상대적인 나는 ‘격’(格)을 지닐 수 없다. 인간이 우애하는 한 비로소 정신적 존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인간(人)의 말(言) 바로 그것이 믿을 신(信)이다. 이것은 남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은 자신을 높이는 길이다. 자신을 높은 곳에 둘 때 타자와의 관계도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인간 속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말하며 인간 몸을 하느님 성전이라 했다. 다석은 이 말을 하느님의 씨앗이라고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 씨앗의 생명력은 무궁무진하다. 결코 죽어 소멸되지 않는다. 이런 하느님 씨가 자신 속에서 싹트고 있다는 깨달음에서 종교가 비롯할 수 있다.” (「제38강 사랑-자신의 덕(곧이)으로 이웃을 이롭게 하라」, 415~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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