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기독교사상] 다양성과 혼종성의 현실에 정직한 신학의 첫걸음
월간 기독교사상 2014년 2월호
며칠 전 체해서 잠을 설친 적이 있다. 뭐든지 골고루 잘 먹는 식성인데도 간만에 매운 음식을 섭취했더니 속이 놀랐던 모양이다. 한국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고 매운 음식이 들어가면 곧잘 소화가 안 되곤 한다. 그러고 보면 한국 사람이라도 각각 식성이 다르고 자기 체질이나 입맛에 잘 맞는 음식이 따로 있다. 주말이면 박물관이나 민속촌을 찾아 아이들과 함께 한국의 전통문화를 즐겨 보지만 돌아오는 길엔 한식이 아니라 양식을 선택한다. 검은 머리 대신에 밝은 색의 염색으로 멋을 낸 사람도 있다. 막걸리 대신 와인을 즐겨 마시지만 오페라보다는 판소리를 좋아한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이미 한국 땅엔 다양하고 상이한 방식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시대의 ‘한국’에는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단일한 그 무엇 대신, 다원적이며 복합적인 정황들이 포착된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적인 것을 되묻고 한국적인 신학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찬석 교수의 책 『글로컬 시대의 기독교 신학』은 신선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묵혀 왔던 질문들이 새록새록 다시 떠올랐다. 그동안 토착화 신학, 문화 신학 또는 한국 신학 등의 꼬리표를 달고 등장한 신학이 과연 다채로운 한국인의 삶을 포괄할 수 있었는가. 적어도 오늘날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쉽게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가. 아니면 ‘이것이 한국적인 것이다.’라고 억지주장을 펼치며 되레 한국인을 당혹스럽게 하지는 않았던가. 한국인에게도 너무나 난해하고 낯설어 소화하기 어려운 주제와 내용의 한국 신학이 과연 한국적인 것일까. 아니, 성서나 기독교 신학과도 전혀 무관한 듯 보이는데도 토착화 ‘신학’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는가. 과연 기존의 토착화 신학은 한국인에게 소화가 잘 되는 신학이었던가. 기존의 토착화 신학은 지나치게 과거와 유래(由來)에 집착하여 현재적 현실과 미래적 전망을 간과하지 않았던가. 기존의 토착화 신학에 대해 이찬석 교수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지금까지 토착화 신학은 복음을 절대적인 것에, 문화를 상대적인 것에 위치해 놓고 복음을 한국적 정황과 상황에 이식하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한국적인 것으로 규정해 놓은 것에서 복음을 끌어내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기존의 토착화 신학은 ‘파종’, ‘발효’, ‘접목’모델로 설명될 수 있는데, 기존의 신학적 기획은 복음과 문화를 각각 절대와 상대, 상수와 변수로 자리매김하거나 그 자리를 바꾸기도 했지만 양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였고 서구 문화의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진정 순수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미 한국적인 것은 서구적인 것과 분리할 수 없으며, 소위 서구적인 것은 이미 한국적인 것의 내부로 형성되고 있지 않은가? 기존의 토착화 신학의 기획을 소중한 신학적 자산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던 ‘한국적인 것’에 대한 솔직한 비판을 이찬석 교수는 새로운 토착화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저명한 신학자의 저술을 단순히 소개하고 정리하는 작업일 수 없다. 또한 성서 본문을 해석학적 사유 없이 그저 이리저리 불러내어 나열하는 일도 아니다. 참으로 신학한다는 것은 우리시대의 도전에 직면하여 신학전통을 철저히 검토하는 사유이면서 동시에 우리시대의 상황을 신학전통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신학적 사유는 한편에서는 과거로부터 흘러온 신학적, 문화적 전통을 되돌아볼 뿐 아니라 오늘날의 상황을 동시대적 감각 속에서 함께 사유하며 신학과 시대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앞서 전망하고 제시하는 사유일 것이다. 한국의 과거에서 한국의 현재로 이동한 신학적 관심사야말로 『글로컬 시대의 기독교 신학』에 내재한 신학적 사유가 기존의 토착화 신학과 다른 점이다. 이 책에서 이찬석 교수는 선배 토착화 신학자들의 사유를 꼼꼼하게 검토할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시대의 한국적 상황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대면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이 간과했던 한국문화의 혼종성을 끄집어냈다. 그는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호미 바바(Homi Bhabha)의 ‘교섭’, ‘전이’ 그리고 ‘혼종성’ 개념을 빌려 오늘날 한국적 상황을 조명한다. 21세기 한국 기독교에는 교섭과 전이의 과정을 거친 독특한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음을 토착화 신학은 전제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서 한국의 많은 젊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보다는 기독교 문화에 더 친숙함을 느끼고, 기독교가 내부이고, 한국의 전통문화가 외부로 인식하는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토착화 신학은 전제로 삼아야 한다. 즉, 한국 기독교의 혼종성을 전제해야만 한다.(32쪽) 복음은 단수가 아닌 다수로 전제되어야 하고, 한국의 문화도 단수가 아닌 다수로 전제되어야 한다. … 21세기의 상황에서 복음과 한국문화는 더 이상 둘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로 인식해서도 안 된다. 복음과 한국문화는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니라는 인식에 근거되어야 한다. 제2부에서는 서구신학과는 다른 아시아 신학을 구성했던 인도 신학자 M.M. 토마스와 대만 신학자 송천성 그리고 스리랑카 신학자 피에리스를 단순히 소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혼종성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사유하여 아시아 신학의 새로운 구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특히 브라만의 인격적 측면인 이스바라를 그리스도와 일치시켜 초역사적 인격주의의 관점에서 기독론을 구상한 파니카(Raimundo Panikkar)와 개체적이고 인격적인 그리스도를 역사적이며 집단주의적 관점에서 민중과 일치시킨 안병무의 기독론을 상호 비판적으로 교차시켜 아시아의 기독론을 위한 단초를 제시한다. 이찬석 교수에 따르면, 토마스의 신학은 서구의 휴머니즘이 가져다 준 아시아의 정치적 혁명의 상황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현존으로 이해하며, 이로써 아시아의 집단주의와 질서중심주의가 극복되고 새로운 인간성 회복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본 점에서 아시아적 에토스(ethos)를 부정적으로 취급한다. 이에 반해 대만 신학자 송천성은 아시아의 정치적 상황보다는 문화적 상황에 주목하며 서구와 분리된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속에 꽃핀 하나님의 숨겨진 영성을 중시하고 드러내고자 한다. 피에리스 역시, 아시아 신학의 토양을 가난과 종교성이라는 코드로 읽으며 자발적 가난을 아시아적 영성의 중심에서 끄집어낸다. 송천성과 피에리스에게 아시아의 영성은 긍정적이면서 서구적인 것과 차별화되고 있다. 이찬석 교수의 비판에 따르면 이처럼 기존의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적 에토스를 서구 신학의 전통과 이항대립 속에서 규정함으로써 오늘날 아시아의 생생한 현실을 반쪽만 들여다 보는 셈이다. 아시아는 피에리스의 분석과는 달리 더 이상 가난을 에토스로 삼기에는 너무 부유하다. 또한 아시아의 종교문화적 상황도 전통적인 종교성으로만 설명되기에는 이미 혼종적이다. 물론 복음이 서구의 신학적 전통과 전적으로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서구적인 것과 전적으로 대립해 있는 아시아적인 것과 무비판적으로 일치될 수도 없다. 서구 기독교의 신학전통이 더 이상 그저 수용될 수 없듯이, 아시아의 영성도 긍정적으로만 평가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찬석 교수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는 서구와 아시아 신학의 상호교차 비판적 기획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결국 아시아 신학은 복음(또는 서구적 기독교)에서 아시아로, 반대로 아시아에서 복음으로의 일방적인 흐름을 방법론으로 선택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빛에서 아시아의 한계성을 읽어가고, 아시아의 종교·문화적 관점에서 복음과 서구신학을 읽어가는 양서류적인 방법론을 추구해야만 한다. 제 3부 ‘글로컬 에큐메니즘을 지향하며’에 소개된 두 논문은 작년에 부산에서 개최되었던 제10차 WCC 부산 총회와 관련이 있어 더욱 흥미롭다. 첫 번째 논문에서 이찬석 교수는 WCC의 신학을 단일한 신학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설파하면서 WCC의 성명서에서 특정 관점과 부분만을 자르고 뽑아내 비판해 온 한국의 보수신학의 행태를 에둘러 비판한다. 하지만 보수신학의 문제뿐이겠는가. 그것은 WCC 신학의 혼종성을 망각한 모든 신학적 사유의 경직성과 획일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 논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원화된 기독교의 상황을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신학적 사유의 유연성을 웨슬리의 신학에서 발굴하고 조명한다. 웨슬리는 종교와 의견을 분리하여, 교리적 차이점을 ‘의견’에 두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종교’에 둔다. 이찬석 교수에 따르면 웨슬리의 이러한 구분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깊이 인식하고 교리적, 교파적 차이를 넘어 연합에 도달할 수 있는 유용한 안목이며, “그리스도교 다원주의”로 명명되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 책은 다양성과 혼종성을 우리시대의 신학하기를 위한 키워드로 삼고 있으며, 기존의 토착화 신학이나 아시아 신학이 내세웠던 우리 것에 대한 순진한 환상을 지적하고 우리 것과 남의 것의 경계가 허물어져 새롭게 열린 ‘제3의 공간’에서 불이적 신학을 구성해야 함을 역설하는 일종의 시론(試論)이라 할 수 있다. 바라기는 이찬석 교수의 단초적 구상이 더 많은 사유의 재료들로 맛깔스럽게 빚어져 글로컬 시대의 기독교 신론으로, 또한 기독론으로, 성령론과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으로 생산되었으면 한다. 한국 신학을 논하면서도 한국인에게 소화되기 어려운 신학, 값어치는 있지만 시대적 합성과 유용성을 상실한 골동품 신학, 작위적인 개념을 앞세워 되레 생생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소경 신학, 세계와 소통하기 어려운 게토화된 신학, 굽힐 수 없는 현실의 다원성을 교리나 신념의 획일성으로 전환시키려는 독단의 신학, 이런 신학적 창작물이 자신의 천재성과 정치색을 앞다투어 뽐내는 시대는 지나갔다. 나는 기독교 신학이 정직하길 바란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 정직하기 바란다. 또한 신학은 신앙을 이해하는 학문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삶의 현실에 비춰 충분히 이해되는 신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 신학의 두 눈은 항상 성서와 현실을 동시에 응시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성서적 현실과 현실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상호 교차시켜 삶의 구원에 관한 미래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책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불이와 혼종성의 개념으로 치밀하게 파고든 이찬석 교수의 고뇌를 읽을 수 있어 매우 기뻤다. 박영식/ 교수는 독일 베텔신학대학교(Theologische Hochschule Bethel)에서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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