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4권 완역, 근대사 판도라 상자 ‘윤치호 일기’
신동립 잡기노트] 4권 완역, 근대사 판도라 상자 ‘윤치호 일기’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58> 윤치호는 18세에 시작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 동안 영어로 일기를 적었다. 최초의 영어통역관, 최초의 미국유학생, 최초의 세례교인, 국제결혼, 최초의 기독교인 각료, 외교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발행, 교육자, 애국가 작사, 찬미가 발행보급, 자선사업가, 체육인, 사회개혁사상가, 종교지도자, 청년운동가, 말년에 친일협력으로 비난받을 때까지 그의 생애는 복잡다단하다. 그의 일기는 구한말의 격동기와 국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겪은 일들과 내면에 품었던 사상을 소상하게 기록한 대하드라마이다. 105인 사건 때, 중요한 시기의 10년치가 넘는 일기가 멸실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윤치호는 일찍이 영어를 구사하여 18세의 소년으로 초대 미국공사의 통역관이 되고 고종 임금과 민비의 총애를 받으며 외국사절들과의 중간 역할을 하면서 국가 경영의 비전을 보았다.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윤웅렬과 윤치호 부자가 목숨까지도 잃는 처벌을 받게 될 고비에서 고종의 특별한 배려로 해외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상해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나 그에게는 축복인 반면에 정치적으로는 위정척사의 대세 아래에서 정적이 많아져 경계 대상이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윤치호 부자는 사면을 받고 연립내각을 구성할 때 10년 만에 귀국하여 외부 협판이 되었으며, 민영환 특사와 함께 러시아 황제 대관식 사절단원으로 다녀온다. 그 후에 독립협회 건으로 조정의 박해를 받으며 여러해 동안 귀양살이 같은 지방관리로 좌천을 당한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던 1904년에 지방으로 내쫓겼던 그가 다시 외부 협판에 재임명되어 제1차 한일의정서를 협상할 때의 이야기가 윤치호 일기에 기록된다. 협상의 절박한 순간에 이하영 외부 대신이 병을 핑계 삼아 자신은 빠지고 협판이던 윤치호에게 떠넘겨 외부 대신 서리로 의정서에 서명하게 된다.
하야시 일본공사가 강요하는 핵심은 조선정부가 외국과 계약을 맺을 때는 반드시 ‘일본 감독관’의 사전승인을 받으라는 세번째 조항이다. 윤치호는 그 대안으로 “‘조선정부와 외국정부 또는 외국인 사이에는 외교부가 모르는 어떠한 조약도 체결할수 없다’로 수정하자”고 제안한다. 즉 ‘일본감독관’이란 낱말을 ‘조선정부의 외교부’란 말로 바꾸자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외부대신이 단독으로 서명할 수 없으며 내각의 심의가결을 받아야 의정서에 서명할수 있다”(1904년 8월21일)고 반박한다. 그러나 그 다음날, 심상훈 참정대신은 어이없게도 “‘일본감독관’을 ‘일본정부대리인’으로 문구를 바꾸면 동의하겠다”고 말해 버렸다. 하야시는 얼른 의정서 세번째 조항을 수정하여 심상훈의 동의를 받아낸다. “심상훈은 하야시에게 내각 결의서와 의정서에 서명하도록 내일 오후 4시에 나, 윤치호를 보내겠다고 했다.”(1904년 8월22일)
그 당시 조정 대신들은 윤치호를 겨우 며칠 동안 외부대신 서리로 이용하고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를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빌미가 되었으나, 내면의 실상을 정확하게 조명해야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다. “(1905년 11월29일) 스티븐스씨, 외부대신 서리 임무를 맡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원래의 외부대신 직과 협판 직에 부여했던 임무가 더 이상 수행할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2.나 자신이 굴욕감을 이길 수 없으며, 우리 동포들에게도 미움을 받는 일입니다. 전에 말씀 드린대로, 조선사람이라면 아무도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 조약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일본은 그 노예문서 같은 계약서에 도장 찍는 조선사람이 아니고는 성과를 거둘 수도 없고 거두지도 못할 것입니다. 3. 왜냐하면, 모멸감에 찬 내 동포들 앞에 나를 드러낼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사람이라면 황제의 말씀을 제쳐 놓고 일본이 약속하는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일본이 자칭 보호국으로서 조선사람들을 공평하고 정의롭고 관대하게 대하는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부정부패가 온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개개인이 자신의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전쟁을 벌이고, 조선은 파멸에 이르고, 따라서 이들은 완전히 권력의 수중에 들게 될 겁니다. 우리의 구원자이며 보호자인 일본은 틀림없이 현명한 자의 눈을 멀게 하는 그럴듯한 규정을 제정하겠지요! 이러한 무리 속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이라고 기대합니까? … ‘나는 우리 황제께서 통치 기반을 깨끗이 마련해 놓고 진정한 개혁을 하시지 않는 한, 어떤 직책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윤치호 일기 제6권) 조정대신들은 젊은 엘리트 윤치호를 각기 자기 진영에 끌어들여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으나 입신양명이 보장된 그 출세의 길을 모두 거절한다. 특히 이노우에 일본공사와 웨베르 러시아공사의 끈질긴 회유를 받는 한편 미국선교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면서도 오로지 나라의 자주와 굳건한 독립만을 추구했다. 본인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국제결혼, 지방색 파벌 타파, 그리스도인으로서 개혁과 신교육 실천을 위해 YMCA운동과 한영서원·송도학교 운영, 독립협회 주도, 독립신문 발간 등에 앞장선 자유평등사상가에게 오랜 구습을 고집하는 기존 세력들은 그를 이방인 취급하고 경계하였다. 개혁이념이 맞는 동지가 몇 사람만 더 있었더라도 조선은 좀 더 일찍 개명했으리라. 윤치호를 아끼고 개혁을 기대했던 이는 오로지 아버지 윤웅렬과 고종황제와 민비, 그리고 외국선교사들 뿐이었다. 그가 친러파도 친미파도 아니고 더구나 친일파는 될 수 없는 인물임을 그의 일기를 통해 알 수있다. 조금도 가식이 없고 솔직하며 아름다운 세계문학사에 오를만한 일기를 기록하였다. 가족들이나 후손들 입장에서는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내용이 많지만, 그는 과거의 잘못들을 성자 어거스틴처럼 참회한 이후에는 ‘한 점 부끄럼 없는 심정으로’ 교육과 선교사업에 헌신했다. 상해 망명 중에 세례를 받은 그는 “우리나라 임금 착하시나 좌우 신하의 죄악 간사와 비루한 기상이 우리나라의 망조이다. … 당금 우리나라 급무는 국민의 지식문견을 넓히며, 도덕 신의를 가르치며, 애국심을 기르는데 있으나, 정부가 그같이 더럽고 썩었으니 무슨나라를 위하여 장대한 도략(道略)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교육을 도와 주며 인민의 기상을 회복시킬 기개는 예수교밖에 없으니 내 나라를 위하여서나 내 한몸을 위해서나 성교(聖敎)에 온 몸의 심력을 다 들여 위로는 구세주의 공덕을 갚고 아래로는 내 영혼 행복을 온전히 하는 것이 대망인 것이다.(1886년 10월22일)”라고 신앙을 고백한다. 화려한 파리의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내 생애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열게 되도다. 죄악에 찬 세상에 ‘돌아 온 탕자’라는 우화를 남겨주신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주님께 진심으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돌아온다면 나를 내치지 않으시리라”(1896년 9월3일)라고 통회의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순탄치 않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희망과 뜻을 펼쳐나가던 시기는 신사유람단원으로 일본에 유학한 일, 미국공사관 통역관으로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던 시기, 상해와 미국 유학시절, 고학으로 저축한 돈을 선교기금으로 맡긴 일, 마 부인과 결혼한후 귀국하여 외부 협판으로 일할 때,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발간한 일, 덕원감리와 삼화감리를 역임한 일, 남감리교를 한국에 설립한 일,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하고 한국 최초로 ‘찬미가’를 발간 보급한 일, 송도학교를 설립한 일, YMCA 활동, 창문사를 설립하고 기독교 서적을 보급한일 등등이다. 서울=뉴시스) 1896년 5월 25일 모스크ㅏ, 앞줄 왼쪽부터 김득련, 융치호, 민영환
반면에 좌절과 박해를 받던 시기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아버지 윤웅렬은 귀양, 본인은 해외로 망명했을 때, 민비 시해사건, 고종을 구출하려는 춘생문 사건 실패로 아버지는 상해로, 본인은 언더우드 집으로 피신했을 때, 러시아황제 대관식 사절단에서 따돌림 당했을 때와 독립협회 건으로 탄압을 받고 원산으로 좌천당했을 때, 한일의정서에 외부대신 서리로 서명을 강요당했을 때, 사랑하는 마 부인과 사별, 105인사건 주모자로 몰려 4년간의 복역,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협력한 일, 전쟁말기에 학도병 지원연설하여 친일파로 낙인찍힌 일 등이다. 근검절약하며 청렴한 윤치호는 나라가 기울어 가는 암울한 시기임에도 자행되는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와 왕실의 무절제한 낭비에 비분강개하며 때로는 임금에게 직언함을 주저하지 않았다.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거나 재물을 위해서 영합한 일이 없고 오히려 선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교육과 자선사업에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는 교회를 배교한일이 없고 신앙을 지켰다. 일본에 협력한 것은 오로지 조국의 장래를 생각하며 교육과 YMCA 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학도병 지원 연설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평생을 조국을 지키며 고뇌에 찬 선각자의 업적에 비하면 미미한 과오에 불과하다. 이 책을 펴낸 신앙과지성사는 “구한말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 속에 외국어도, 해외여행 경험도 없는 국가원수 사절단장 민영환과 10여년 유학 경험으로 외국어에 능통한 학부협판 윤치호가 함께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러 떠난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비극적 사건이 있었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 임금은 아관파천해 있는 상황이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지구 반바퀴를 돌아돌아서 모스크바로 기나긴 여행길을 떠났고, 황제 대관식 참관기와 외국 경험도 없고 외국어도 못하는 민영환과의 갈등이 재미있으면서도 동서양 문화와 가치관의 충돌 속에 약소민족이 처한 비애를 느끼게 한다. 유일하게 아직 번역되지 않은 윤치호 일기 4권을 완역했고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추천했다. 역사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과제를 찾게 하는 유익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온라인편집부장 reap@newsi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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