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그 맛을 모른다>, 김연호 지음, 밀알라이프(신앙과지성사), 2021)
Ⅰ 나의 청년 시절만 해도(1970-80년까지) 교회 게시판에는 ‘성미표’라는 것이 눈길을 끌었었다. 이름 위에 도장들이 꾹 찍혀 있었다. 연말이 되어 이름 위에 도장이 길게 찍힌 것은 쌀을 사 먹을 형편이 양호한 교우 가정이고, 시작이나 중간쯤에 도장이 끝난 것은 형편이 어려워 쌀 사 먹기가 궁색한 가정들이었다. 형편은 어찌 되었든 교인들은 구입한 쌀에서 제일 먼저 첫 공기를 수북이 떠서 교회에 바쳤고, 바쳐진 그 쌀들이 목회자들의 ‘빵’이 되었다. 고2 때부터 교회에 나가게 된 나는 여학생들과 함께 하는 활동시간의 신비만큼이나 교회의 성미표를 유심히 살피곤 했던 기억이 있다. 새삼스럽게 지금 옛 생각을 하다 보니 길었던 짧았던 꾹꾹 눌려진 인주밥의 성미표는 눈물 젖은 교우들의 빵이었다. 그래서 많은 교우들이 첫 공기를 정성껏 봉지에 담으며 “우리 식구들 모두 이걸(빵을)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목사님도 이 빵을 드시면서 우리를 잘 이끌게 해 주세요.”하고 빌었던 것은 아닐까? Ⅱ 그날의 춘천행 기차는 유난히 더 덜컹거렸다. 이광섭 목사가 전해준 김연호 목사님의 이야기가 춘천행 청춘열차를 그날따라 더 덜컹거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형, 김 목사님이 인천 계산교회 담임할 때 6.25가 터졌고, 인천 어느 부둣가에 큰 배가 제주도로 목회자들을 태우고 가려고 기다리는데, 김 목사님은 교인 200명을 이끌고 그리로 갔데요. 난리가 났다지, 이 배는 목회자 외에는 탈 수가 없다!! 김 목사님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았고, 아니, 목사들만 사람이냐 싸우면서 모두 다 배에 교인들을 올라타게 했데요. 할 수 없이 선장은 제주 애월까지 갔고, 김 목사님은 황무지 제주 땅을 교인들과 협동농장을 하면서 함께 살았데요. 아침 일찍 나오고 밤늦게 들어 갔는데 글쎄 어느 하루는 쥐를 잡기 위해 쥐약탄 밥을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김 목사님 큰아들이 집을 지키다가 글쎄 그 밥을 먹고 … ” 차라리 안 들었던 게 나았던 이야기를 광섭 목사는 먼 여행길에서 왜 내게 그 말을 전했는지, 그러나 듣고 보니 김연호 목사님의 책 이름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그 맛을 모른다>라는 다소 신파조의 책 이름이 새롭게 들려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1920년생인 김 목사님은 평양 요한신학교에 다니면서 20대 초반부터 빈민굴에 가서 아이들과 침식을 같이하며 공부를 가르쳤다. 대동강가를 함께 뛰며 게으르고 무기력한 정신을 개혁하려고 매일 밤 12시에 자고 4시에 기침하여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단다. 그 집단이 자연스럽게 신망애교회가 되었고 김 목사님은 거지 대장 전도사로 우뚝 섰단다. 이 책은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은 사연들이 가득하여 일일이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다. ‘눈물 젖은 빵?’ 의미부여에 도사 격인 이덕주 교수는 추천사에서 풍요와 쾌락의 시대를 사는 요즘 젊은 세대가 그 의미를 알까? 먹방이 대세인 요즘 ‘눈물 젖은 빵’이라 하면 빵을 맛있게 먹는 새로운 레시피쯤으로 생각할 것 같단다. 이 교수는 ‘눈물 젖은 빵’은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던 일제강점기 말에 태어나 해방의 감격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 분단으로 인한 전쟁과 폐허, 빈곤과 독재 시대를 살면서 교회 부흥과 성장을 일궈낸 분들의 삶과 교훈이 농축된 표현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왜 겸허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제대로 말해 주는 책을 내 손으로 펴낼 수 있음이 감사했다. 너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서 서너 시간이면 한 권을 다 읽는 책을 독자들이 오랜만에 만날 수 있겠다.
Ⅲ 최병천 장로(신앙과지성사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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